1. 야심 찬 계획과 현실의 날씨
라가주오이 산장에서 맞이한 일출은 완벽했습니다. 그 기세를 몰아 3일 차 계획은 야심 차게 세웠습니다. 오전에는 친퀘토리(Cinque Torri) 트레킹, 오후에는 아르멘타라 초원을 걷고, 저녁에는 파소 가르데나에서 여유를 즐기는 일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행은 늘 변수를 동반합니다.
라가주오이 주차장에서 차로 2분 거리인 콜 갈리나(Col Gallina) 무료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두터운 비구름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어제의 황홀했던 맑은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돌로미티의 봉우리들은 구름 속에 자취를 감췄습니다. 우리는 배낭에 판초 우의와 방풍 재킷을 챙겨 넣고,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트레킹을 시작했습니다.

[Trekking Info] 친퀘토리 트레킹 (Cinque Torri Loop)
- 시작 지점: Col Gallina (2,054m)
- 경로: Col Gallina → 리메데스 호수(Lago di Limedes) → 아베라우 산장(Rifugio Averau) → 누볼라우 산장(Rifugio Nuvolau) → 스코이아톨리 산장(Rifugio Scoiattoli) → (리프트 하산) → Col Gallina 복귀
- 난이도: 중간 (우중 산행 시 주의 필요)
- 준비물: 돌로미티의 날씨는 급변합니다. 6~10월 트레킹 시즌이라도 고산지대는 기온이 낮으므로 방수 재킷, 판초 우의, 경량 패딩은 필수입니다.

2. 구름이 가린 풍경, 발밑에서 찾은 위로
트레킹 초입, 리메데스 호수(Lago di Limedes)는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호수에 비친 웅장한 반영을 기대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흐릿한 물웅덩이뿐이었습니다.

실망감이 밀려올 즈음,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발밑의 세상이었습니다. 원경(遠景)이 사라지자 근경(近景)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6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돌로미티의 야생화 시즌답게, 트레일은 천상의 화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실레네 불가리스(Silene Vulgaris)였습니다. 하얀 꽃잎 뒤로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꽃받침이 마치 복주머니 같아 시선을 끌었습니다.

그 옆으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벌노랭이(Birdsfoot trefoil)와 토끼풀도 지천으로 피어 있었습니다. 한국의 양지바른 산에서 보던 꽃들을 이국적인 알프스 돌산에서 마주하니, 식물의 생명력과 보편성에 새삼 경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아들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작은 야생화에 렌즈를 맞추고 있었습니다.

웅장한 산세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아들은 그 대신 발밑의 작은 아름다움을 발견해 낸 것입니다. 산은 산이고 꽃은 꽃이지만, 남들은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그 작은 차이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는 모습. 대학생이 된 아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이 호기심을 소중하게 지켜갔으면 합니다. 거창한 목표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무릎을 낮춰야만 보이는 작고 소중한 가치들을 놓치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셔터를 누르는 아들의 등 뒤에서 조용히 바라봅니다.
3. 길 잃음,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흔적
꽃에 취해 걷다 보니 정작 중요한 길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비가 흩뿌리는 와중에 우의를 뒤집어쓰고 땅만 보고 걷다 갈림길의 표지판을 지나친 것입니다.
데이터 통신마저 끊긴 회색빛 바위 지대. 인적은 드물고 빗줄기는 굵어졌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험한 바위산을 오르는 대신 안전한 내리막길을 택해 우회했습니다. 다행히 운행하지 않는 리프트 라인을 이정표 삼아 오르다 보니, 중간 목적지인 아베라우 산장의 표지판이 나타났습니다.

트레일 표식과 국기
돌로미티의 등산로 표식은 빨간색과 흰색 줄무늬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오스트리아 국기와 매우 흡사합니다. 실제로 이 지역은 1차 대전 이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티롤)였기에, 산길 곳곳에 남은 표식들에서 과거의 흔적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길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 작은 표지판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가이드인지 깨닫게 됩니다.

도중에 만난 슬로베니아인 부부의 조언은 결정적이었습니다. “지금 가려는 길은 험한 돌산이니, 다시 내려가서 정규 탐방로를 따르라”는 그들의 충고 덕분에 우리는 더 큰 위험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4. 가족의 갈등, 여행의 분수령
길을 잃고 헤매던 그 시간은 우리 가족 여행의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경로 선택을 두고 의견이 갈렸고, 궂은 날씨 속에 피로가 겹치며 예민해진 탓에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습니다.
“왜 지도를 미리 확인하지 않았나”, “이쪽 길이 맞다, 아니다”. 비에 젖은 채 벌어진 격렬한 논쟁. 하지만 이 불편한 과정 또한 가족 여행의 민낯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과 행동 패턴을 확인하고, 충돌하고, 다시 수습해가는 과정. 결국 우리는 다시 표지판을 찾아 묵묵히 함께 걷는 것으로 화해의 첫발을 떼었습니다.
5. 아베라우 산장(Rifugio Averau): 구름 위의 미식, 그리고 전망대
우여곡절 끝에 아베라우 산장(Rifugio Averau, 2,413m)에 도착했습니다. 빗줄기가 굵어져 더 이상의 산행은 무리라고 판단, 이곳에서 비도 피하고 점심도 해결하며 숨을 고르기로 했습니다.

트레커들 사이에서 아베라우 산장은 ‘돌로미티 최고의 미식 산장’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실제로 트립어드바이저 등에서 높은 평점을 받고 있는데, 직접 맛본 음식들은 그 명성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했습니다. 톡톡 터지는 식감이 일품인 어란 파스타(Spaghetti con Bottarga)와 치즈를 얹어 구워낸 팀발로(Timballo), 그리고 바삭한 밀라노식 커틀릿까지. 산장에서 맛보는 수준급 요리는 가족 간의 냉랭했던 기류를 조금씩 녹여주었습니다. 비록 영수증엔 79유로가 찍혔지만, 그 이상의 가치를 한 식사였습니다.



[Trekker’s Tip] 아베라우 산장
- 위치: 아베라우 산과 누볼라우 산 사이의 옴폭 들어간 안부(Saddle)에 위치해 바람골이 형성되는 곳이지만, 그만큼 양방향 뷰가 탁월합니다.
- 전망: 맑은 날 테라스에 앉으면 북쪽으로는 토파나(Tofana) 산군이, 남쪽으로는 돌로미티 최고봉인 마르몰라다(Marmolada)와 치베타(Civetta)가 파노라마로 펼쳐집니다.
- 접근성: 도보 접근 외에도 페데레(Fedare) 리프트를 이용해 쉽게 올라올 수 있어, 걷기 힘든 여행객도 고산 풍경과 미식을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입니다.

6. 안개 속 하산, 스코이아톨리 산장
식사 후에도 구름은 걷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무리한 도보 하산 대신 계획을 변경했습니다. 오늘 오전에 개시한 슈퍼섬머 패스(5일권)를 활용하여 리프트를 타고 내려가기로 한 것입니다.
아베라우 산장에서 완만한 내리막을 따라 조금만 이동하면 스코이아톨리 산장(Rifugio Scoiattoli, 2,255m)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곳 앞에서 ‘친퀘토리 리프트’에 몸을 실었습니다.

[View Point] 스코이아톨리 산장
- 친퀘토리의 특등석: 산장 이름인 ‘스코이아톨리’는 이탈리아어로 다람쥐를 뜻하며, ‘친퀘토리(5개의 탑)’를 정면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거대한 바위 탑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지는 곳입니다.
- 접근성: ‘바이 데 도네스(Bai de Dones)’ 주차장에서 리프트가 직통으로 연결되어 접근성이 매우 좋습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올라와 인생 사진을 남길 수 있습니다.
- 야외 박물관: 산장 바로 앞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와 포진지가 복원된 **’야외 박물관(Open Air Museum)’**의 시작점입니다. 역사와 자연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어 교육적으로도 훌륭한 코스입니다.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리프트 위에서, 발아래 흐릿하게 보이는 초원과 바위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비록 맑은 날의 웅장한 친퀘토리는 보지 못했지만, 안개 속에 숨겨진 돌로미티의 또 다른 표정을 본 것으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리프트 하차장인 ‘바이 데 도네스’에 내려, 다시 파소 팔자레고 도로를 따라 30분을 걸어올라 차를 세워둔 콜 갈리나로 돌아왔습니다.
7. 여행이 주는 교훈
오늘 우리는 계획했던 친퀘토리 풍경을 보지 못했습니다. 길을 잃었고, 비를 맞았으며, 가족끼리 다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학생이 된 두 아들과 부딪히며 겪은 이 갈등이 오히려 약이 되었다고 말이죠. 갈등 없는 여행은 평화롭지만, 갈등을 극복한 여행은 성장을 줍니다. 고요한 호수처럼, 격렬한 논쟁 후 찾아온 평온함은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구름 낀 하늘도, 잃어버린 길도, 그리고 가족 간의 다툼마저도 여행의 일부임을 받아들입니다. “여행의 진정한 가치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겪는 시행착오와 깨달음에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 가족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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