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02[돌로미티]: 돌로미티의 상징,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

1. 두 개의 이름, 세 개의 봉우리

미주리나 호수를 떠나 도착한 곳은 돌로미티의 상징,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Tre Cime di Lavaredo)입니다. 이탈리아어로는 ‘라바레도의 세 봉우리’라는 뜻이지만, 이곳의 역사적 뿌리인 오스트리아(티롤)식으로는 ‘드라이 진넨(Drei Zinnen)’이라 불립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 거대한 암봉들은 마치 대지가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듯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치마 그란데(Cima Grande): 2,999m (중앙), 치마 오베스트(Cima Ovest): 2,973m (서쪽), 치마 피콜라(Cima Piccola): 2,857m (동쪽))

2. 해발 2,300m의 주차 전쟁

트레 치메는 돌로미티에서 가장 많은 여행자가 찾는 곳입니다. “오전 8시 이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유경험자들의 조언을 따라 서둘렀지만, 미주리나 호수에서 지체한 탓에 8시를 조금 넘겨 톨게이트에 진입했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꼬불꼬불한 산악 도로 위에서 차들이 멈춰 섰습니다. 자칫 오늘의 모든 일정이 꼬일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쯤, 다행히 차량 흐름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주차장 입구 전광판에 표시된 남은 자리는 ‘309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30유로의 통행료(주차비 포함)를 지불하고 아우론조 산장(Rifugio Auronzo) 주차장에 입성했습니다. 관리 요원들의 수신호에 따라 해발 2,320m의 가파른 언덕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비로소 돌로미티의 심장에 들어왔음이 실감 났습니다.

3. 전쟁의 상처 위를 걷다 (아우론조 ~ 라바레도)

본격적인 트레킹은 아우론조 산장에서 시작해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101번 트레일을 택했습니다. 초반부는 비교적 평탄한 길로, 오른쪽으로는 톱니바퀴처럼 날카로운 카디니 디 미주리나(Cadini di Misurina) 산군이 병풍처럼 펼쳐집니다.

약 1km 지점에서 만난 작은 예배당 ‘카펠라 델리 알피니(Cappella degli Alpini)’를 지나며, 문득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100여 년 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곳은 이탈리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의 최전선이었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암벽 중간중간에 뚫려 있는 인공적인 동굴과 구멍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자연 동굴이 아니라, 당시 군인들이 포격을 피하고 물자를 보관하기 위해 파놓은 참호와 터널의 흔적입니다. 지금 우리가 감탄하며 걷는 이 아름다운 길은, 과거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국경선이었습니다.

4. 돌로미티의 영웅들, SUEM 118

트레킹 도중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노란색 헬기 한 대가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베네토 주의 산악 구조대인 SUEM 118 헬기였습니다.

헬기는 망설임 없이 직선으로 하강하더니, 등산로 바로 옆 좁은 자갈밭에 전광석화처럼 착륙했습니다. 의료진이 내려와 고령의 등산객에게 응급처치를 하고 이송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놀라울 정도로 짧았습니다. 과거 캠핑카 여행 중 이탈리아 경찰의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오버랩되며, 이들의 신속한 대응 시스템과 헌신에 깊은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헬기 소동이 정리되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자, 곧이어 라바레도 산장(Rifugio Lavaredo, 2,344m)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트레 치메의 동쪽 사면 바로 아래, 거친 돌무더기 위에 지어진 이 산장은 붉은색 창문 덮개가 인상적인 석조 건물입니다. 산장 뒤편으로는 뾰족한 창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카디니 산군이 성벽처럼 둘러쳐져 있고, 앞쪽으로는 거대한 트레 치메의 암벽이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합니다.

잠시 산장 앞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봅니다. 척박한 바위틈에서도 끈질기게 피어난 야생화들과, 그 위를 묵묵히 걸어가는 트레커들의 행렬. 인간이 만든 산장과 신이 빚은 암봉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멋진 풍경이었습니다.

5. 최고의 뷰포인트, 로카텔리 산장

포르첼라 라바레도(Forcella Lavaredo) 고개를 넘어서자, 드디어 세 봉우리의 웅장한 북쪽 사면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반환점인 로카텔리 산장(Rifugio Locatelli / Dreizinnenhütte)이 보입니다.

해발 2,405m에 위치한 이 산장은 트레 치메의 ‘북벽(North Face)’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유일한 산장입니다. 사진가들이 열광하는 트레 치메의 붉은 일몰과 일출(알펜글로우)을 가장 완벽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특등석’인 셈입니다.

비록 숙박은 못 했지만, 산장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간단한 간식을 즐겼습니다. 메뉴는 소박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 어떤 미슐랭 레스토랑보다 화려했습니다. 웅장한 세 개의 돌덩어리를 배경으로 가족과 함께 숨을 고르는 이 시간. 아이들도 힘든 내색 없이 이 압도적인 풍경을 즐기는 듯해 마음이 놓였습니다.

6. 길 위에서 찾은 것들

돌아오는 길은 105번 트레일을 따라 랑갈름(Langalm) 목초지를 지나는 코스입니다. 웅장한 암봉 아래 평화롭게 풀을 뜯는 소들과, 그 사이를 거니는 두 아들을 봅니다. 대학생이 되어 각자 머리가 굵어진 녀석들이지만, 대자연 앞에서는 다시 호기심 가득한 아이의 표정으로 돌아갑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우리 안에는 항상 호기심 많은 아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평생 호기심 많은 사람으로 늙어가길 바랍니다.”

특히 산을 내려오며 만나는 계곡은 리엔자 강의 원천(Sorgenti Fiume Rienza)이 되는 곳입니다. 이곳에 형성된 맑고 작은 연못들은 마치 거울처럼 트레 치메를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거친 암봉이 부드러운 물결 위에 데칼코마니처럼 비치는 이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비록 시간 관계상 계획했던 ‘카디니 뷰포인트’는 포기해야 했지만, 아쉬움보다는 충만함이 큽니다. 터덜터덜 걷는 무념무상의 걸음 속에 일상의 고민들이 산바람에 흩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날카로운 창검 같은 카디니 산군(왼쪽)과 묵직한 크리스탈로 산군(오른쪽) 사이로, 우리가 지나온 계곡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돌로미티는 어디를 둘러봐도 그림이 됩니다.

7. 라가주오이를 향하여

예상보다 길어진 트레킹으로 오후 일정이 급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원래 계획했던 코르티나담페초 시내구경, Cima-Tofana 케이블카, Passo Giau 드라이브는 모두 생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숙소인 ‘라가주오이 산장’으로 가는 마지막 케이블카가 16시 40분에 마감되기 때문입니다. 급하게 하산하여 아우론조 산장 아래 작은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엑셀을 밟습니다.

세 봉우리가 주는 압도적인 풍경과 그 속에 담긴 역사, 그리고 가족과 함께 걸으며 나눈 시간들.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는 우리 가족에게 돌로미티의 ‘심장’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 독자를 위한 여행 정보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 트레킹을 계획하는 분들을 위한 실전 팁입니다.

1. 주차 및 접근성

  • 골든타임: 성수기(7~8월)에는 오전 8시~9시 사이에 아우론조 산장 주차장이 만차(Full)가 됩니다. 만차 시 진입이 통제되므로, 최소 8시 이전 도착을 목표로 하세요.
  • 통행료: 일반 승용차 기준 30유로입니다. (주차비 포함 개념)
  • 대중교통: 자가용 이용이 어렵다면 도비아코(Dobbiaco)나 미주리나에서 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 트레킹 코스 추천

  • 국민 코스 (순환): 아우론조 산장(Start) → 101번 길 → 라바레도 산장 → 포르첼라 라바레도(고개) → 로카텔리 산장(반환점) → 105번 길 → 랑갈름 → 아우론조 산장
  • 소요 시간: 사진 찍고 식사하는 시간 포함 최소 4~5시간을 잡는 것이 여유롭습니다. (순수 걷는 시간은 3시간 내외)
  • 난이도: 초중급. 고도차가 크지 않고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걸을 수 있습니다.

3. 복장 및 준비물

  • 해발 2,300m 이상인 고지대이므로 한여름에도 바람이 불면 춥습니다. 바람막이는 필수입니다.
  • 자외선이 매우 강하므로 선글라스와 선크림을 꼭 챙기세요.
  • 트레킹화나 바닥이 단단한 운동화를 추천합니다. (자갈길이 많음)

4. 팁

  • 카디니 디 미주리나 뷰포인트: 아우론조 산장 주차장에서 반대편(남쪽)으로 가는 117번 길을 따라 왕복 1시간 정도 다녀오면 ‘모르도르’ 같은 뾰족한 암봉들을 배경으로 인생 사진을 남길 수 있습니다. (저희는 시간 부족으로 패스했습니다.)

5. 계획했으나, 방문하지 못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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