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라딘 문화의 중심지, 알타 바디아 (Alta Badia)
친퀘토리에서의 궂은 날씨를 뒤로하고 고개를 넘자, 돌로미티의 남동부 알타 바디아 지역이 나타났습니다. 거짓말처럼 파란 하늘이 열리며 “돌로미티의 하늘은 한 시간에 네 계절을 보여준다”는 속담을 증명해 보입니다.
코르바라(Corvara), 바디아(Badia) 등 6개의 마을로 이루어진 이 지역은 발 푸스테리아와 발 가르데나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입니다.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독특한 언어와 문화에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이탈리아어도, 독일어도 아닌 ‘라딘어(Ladin)’라는 고유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로마 시대 군인들의 라틴어와 알프스 원주민(레티안족)의 언어가 섞여 만들어진 이 언어는, 알타 바디아를 포함해 발 가르데나, 발 디 파사 등 셀라(Sella) 산군을 둘러싼 5개 계곡 지역에서만 약 3만 명이 사용하며 2,000년의 역사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이정표마다 적힌 낯선 단어들은 바로 이 자부심 강한 산악 민족의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2. 라 크루스크(La Crusc), 성소로 향하는 리프트
오후 4시, 바디아 마을의 라 크루스크 리프트 승강장에 도착했습니다. 유명 관광지마다 어김없이 발생하는 주차비가 여행 내내 부담스러웠는데, 이곳의 ‘무료 주차장’은 여행자에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었습니다.
리프트 마감 시간(17:30)이 임박해 9km 트레킹을 온전히 소화하기는 무리였습니다. 우리는 전략을 수정하여 리프트를 타고 정상부의 핵심 풍경과 야생화 초원만 둘러보고 내려오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리프트에 몸을 싣자, 비구름이 걷힌 파란 하늘 아래 전형적인 티롤 지방의 목조 가옥들과 초록빛 구릉이 그림처럼 펼쳐졌습니다.

이어 갈아탄 두 번째 리프트는 우리를 더 높은 고도로, 거대한 바위산의 턱밑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3. 절벽 아래의 성소, 산타 크로체 (Santa Croce Sanctuary)
리프트에서 내리자마자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수직으로 솟구친 사소 들라 크루스크(Sasso Dla Crusc)의 거대한 암벽입니다.

그리고 그 웅장한 바위산 아래, 새하얀 작은 성당 하나가 고요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곳은 산타 크로체 성소(Santa Croce Sanctuary)입니다. 라딘어로는 ‘La Crusc’, 독일어로는 ‘Heiligkreuz’라 불리는 이곳은 1484년에 처음 지어진 유서 깊은 순례지입니다.
오전의 비바람이 언제였냐는 듯, 맑게 갠 하늘과 구름이 성당의 첨탑 위로 평화롭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거친 자연의 위용과 인간의 신앙이 만들어낸 건축물이 이토록 조화로울 수 있다는 사실에 경외감이 듭니다.
4. 야생화의 천국, 아르멘타라 초원 (Armentara Meadows)
성당을 지나 발길을 옮기면 아르멘타라 초원이 시작됩니다. 이곳은 ‘꽃의 바다’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돌로미티 내에서도 손꼽히는 야생화 군락지입니다.

비록 시간 관계상 초원의 깊은 곳까지 걷지는 못했지만, 초입에서 마주한 풍경만으로도 이곳의 가치를 알기엔 충분했습니다. 초록 융단 위에 프림로즈, 글로브 플라워, 젠티안 등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형형색색 수를 놓고 있었습니다. 숲속에 조용히 자리 잡은 오래된 통나무 오두막은 동화 속 풍경을 완성합니다.

“오전에는 회색빛 바위와 안개를 보았다면, 오후에는 총천연색의 꽃과 파란 하늘을 봅니다. 하루 동안 극과 극의 풍경을 마주하며, 우리는 돌로미티가 가진 다양성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됩니다.”
5. 아르멘타라 메도우 트레킹 정보
저희는 시간상 리프트 왕복을 택했지만, 시간이 허락한다면 아래 코스로 온전한 트레킹을 즐기시길 강력히 추천합니다. 비교적 평탄하고 풍경이 아름다워 가족 단위 여행객에게 최적입니다.
- 위치: 알타 바디아(Alta Badia), 파네스-세네스-브라이에스 자연공원 서쪽 가장자리
- 주차: 바디아(Badia) 마을 La Crusc 리프트 하부 승강장 (무료)
- 추천 코스: La Crusc 성당(2,045m) → 아르멘타라 초원 → Ranch da André → Valgiarëi → Furnacia → 바디아 마을 (원점 회귀)
- 난이도: 쉬움 (Easy)
- 소요 시간: 약 3.5시간 (8.8km)
- 특징: 산타 크로체 산의 수직 암벽과 부드러운 초원 지대가 극적인 대비를 이룹니다.


6. 마치며: 변덕이 선물한 여유
오전의 친퀘토리 트레킹이 ‘인내’였다면, 오후의 아르멘타라는 ‘보상’이었습니다. 비록 계획했던 9km의 트레킹을 완주하지는 못했지만, 리프트 위에서 내려다본 알타 바디아의 풍요로운 풍경과 산타 크로체 성당의 고즈넉함은 여행의 피로를 씻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무엇보다 날씨의 변덕 덕분에, 우리는 무리해서 걷는 대신 벤치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는 여유를 얻었습니다. 때로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다음에 다시 돌로미티를 찾는다면, 그때는 하루를 온전히 비워 이 천상의 화원을 천천히 걸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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