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6시 40분의 데드라인, 그리고 고도 1,000m의 상승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에서의 긴 트레킹을 마치고 늦은 점심을 해결한 뒤, 우리는 서둘러 차를 돌렸습니다. 코르티나 담페초 시내 구경도, 파소 지아우(Passo Giau) 드라이브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오늘 우리가 묵을 숙소인 ‘라가주오이 산장’으로 향하는 마지막 케이블카가 16시 40분에 끊기기 때문입니다.
파소 팔자레고(Passo Falzarego) 주차장에 도착해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매표소로 향했습니다. 이곳에서 8일간의 돌로미티 여정을 책임질 ‘돌로미티 슈퍼섬머 카드(Dolomiti Supersummer Card)’ 5일권을 수령하고, 산장 숙박객을 위한 편도 상행 티켓을 끊었습니다.
케이블카에 몸을 싣자 해발 2,100m의 고개에서 순식간에 2,752m 정상으로 고도를 높입니다. 불과 몇 분 만에 600m 이상의 수직 고도를 오르는 경험은 시각적으로 압도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고산병에 대한 막연한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2. 돌로미티 슈퍼섬머 패스: 8일간의 자유이용권
돌로미티 여행 준비의 난제 중 하나는 리프트권 선택입니다. 지역마다 별도의 패스(발 가르데나 카드 등)가 있고, 전체를 아우르는 패스가 또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8일 동안 코르티나 담페초, 발 가르데나, 알타 바디아 등 여러 지역을 종횡무진 누빌 계획이었기에 ‘돌로미티 슈퍼섬머 카드(Dolomiti Supersummer Card)’를 선택했습니다.
이 카드도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뉩니다.
- 포인트 차감권 (Points Value Card): 탈 때마다 리프트별로 정해진 포인트가 차감되는 방식 (적게 타는 사람에게 유리)
- 기간 정액권 (Time-based Card): 정해진 기간 내에 무제한 탑승 (많이 타는 사람에게 유리)
저희는 ‘7일 중 5일 사용권(5 days out of 7)*을 구매했습니다. 2025년 성인 기준 180유로로, 하루 평균 약 36유로꼴입니다. 돌로미티의 주요 케이블카 왕복 요금이 보통 25~40유로인 점을 감안하면, 하루에 리프트를 2회 이상만 탑승해도 본전을 뽑고도 남는 셈이죠. 특히 ‘세체다’나 ‘알페 디 시우시’ 같은 비싼 구간을 이용할 때 그 진가가 발휘됩니다.
💡 여행 꿀팁: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 저희가 라가주오이 산장에 올라갈 때, 패스를 쓰지 않고 굳이 ‘편도 티켓’을 따로 끊은 이유가 있습니다.
슈퍼섬머 패스는 ‘개시한 날’을 기준으로 1일이 차감됩니다. 만약 오늘 오후 4시에 라가주오이행 리프트 한 번을 타기 위해 카드를 찍어버리면, 그 비싼 ‘1일 치(약 36유로 가치)’가 리프트 한 번으로 소모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상행(편도)은 현장 발권하고, 다음 날 아침 하행부터 패스를 개시하는 전략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면 다음 날 하행 리프트부터 시작해 다른 지역(친퀘 토리 등)의 리프트까지 하루 종일 알차게 5일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정을 짤 때 리프트를 적게 타는 날과 많이 타는 날을 구분해서 패스 사용 전략을 세우시길 추천합니다.
참고로 2025년 슈퍼섬머 패스는 5월 23일부터 11월 9일까지 유효하며, 돌로미티 전역 140여 개의 리프트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2. 구름 위의 요새, 라가주오이 산장 (Rifugio Lagazuoi)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절벽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목조 건물, 바로 ‘라가주오이 산장’입니다. 해발 2,752m, 코르티나 담페초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이 산장은 돌로미티 최고의 파노라마 뷰를 자랑합니다.


이곳은 단순한 숙박 시설이 아닙니다. 1964년, 전설적인 산악 가이드 우고 폼파닌(Ugo Pompanin)이 건설한 이래 3대째 가족 경영으로 이어오고 있는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무엇보다 이곳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이 치열하게 대치했던 격전지였습니다. 산장 아래 뚫려 있는 수많은 땅굴과 참호들은 이곳이 ‘자연의 전망대’이기 이전에 ‘피의 전장’이었음을 무겁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3. 102호실의 에티켓: 12명의 동거
체크인을 마치고 배정받은 곳은 102호실. 2층 침대들이 빼곡히 들어찬 12인실 도미토리였습니다.

창가 쪽 명당은 먼저 도착한 4명의 노년 여성 그룹이 차지하고 있었고, 우리 가족은 그 옆 2층 침대 두 개를 배정받았습니다.
우려와 달리 102호실은 절간처럼 고요했습니다. 먼저 오신 어르신들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가 몸에 배어 있었고, 그 무언의 에티켓 덕분에 우리 가족 또한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산장의 질서에 녹아들었습니다. 1박에 인당 105유로(하프보드 포함)라는 금액이 처음엔 부담스러웠지만, 해발 2,700m에서 누리는 이 안락함과 질서를 생각하면 납득할 수 있는 가치였습니다.
4. 하늘 위에서의 아페리티보 (Aperitivo)
짐을 풀고 테라스로 나오니, 아직 해가 지기엔 이른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구름과 어깨를 나란히 한 테라스에서 우리는 이탈리아의 식전주 문화를 즐기기로 했습니다.

주황빛 아페롤 스프리츠(Aperol Spritz)와 청량한 프로세코(Prosecco) 한 잔. 발아래 펼쳐진 거친 암봉들을 안주 삼아 마시는 이 한 잔은 단순한 알코올 섭취가 아닌, 고된 트레킹을 마친 여행자에게 주는 달콤한 보상이었습니다.
산장 주변을 가볍게 산책하며 마주한 피콜로 산(Piccolo Lagazuoi) 정상 부근의 십자가와 광활한 산맥은 조금 과장되긴 했지만 마치 천지창조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장엄했습니다.


5. 환대와 품격, 산장의 저녁 식사
오후 6시 30분,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산장 식당은 기대 이상으로 체계적이었습니다. 지정된 테이블 위에는 나무를 깎아 만든 명패에 호실과 이름이 정갈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수많은 등산객을 받으면서도 개인을 존중하는 세심한 환대였습니다.

3코스로 제공된 저녁 식사는 훌륭했습니다. 척박한 고산 지대에서 따뜻한 파스타와 고기 요리, 그리고 달콤한 티라미수까지 맛볼 수 있다는 것은 현대 문명의 혜택이자 운영진의 노고 덕분일 것입니다.



6. 엔로사디라(Enrosadira): 돌이 빛으로 변하는 시간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돌로미티의 하이라이트인 일몰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돌로미티의 암석은 마그네슘과 칼슘 탄산염이 주성분인 백운암(Dolomite)으로 이루어져 있어, 빛의 파장이 길어지는 일출과 일몰 시 붉은색과 분홍색을 띠게 됩니다.


현지 라딘어(Ladin)로 ‘분홍빛으로 변하다’라는 뜻을 가진 엔로사디라(Enrosadira) 현상은 마법 같았습니다 [cite: IMG_2151.JPG, IMG_2151 (1).JPG]. 회색빛이었던 거대한 암봉들이 서서히 황금빛으로, 다시 붉은빛으로 타오르다 이내 차가운 보랏빛으로 사그라들었습니다. 자연이 연출하는 가장 극적인 드라마 앞에서 우리는 말을 잃고 그저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7. 산장의 밤, 그리고 이중 무지개의 아침
밤 10시, 산장에 소등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등산화는 신발장에 두고 실내화로 갈아신어야 하는 규칙 덕분에 복도는 조용하고 청결했습니다. 낯선 이들과 섞여 자는 밤이었지만,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매너 덕분에 깊은 잠을 청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출을 보기 위해 나선 우리를 맞이한 건 뜻밖의 선물이었습니다.


붉게 타오르는 아침의 엔로사디라와 함께, 계곡 사이로 선명한 쌍무지개가 떠오른 것입니다.


절벽 끝 산장이 자연이 만든 거대한 전망대임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탈리아식 크루아상(Cornetto)과 햄, 치즈, 커피로 채운 뷔페식 아침 식사를 끝으로 우리는 하산을 준비했습니다.


8. 에필로그
라가주오이 산장은 단순한 숙소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1차 대전의 아픈 역사를 품은 현장이자, 돌로미티의 대자연을 가장 가까이서 대면할 수 있는 성소였습니다.

편리한 호텔을 두고 굳이 불편한 잠자리와 비싼 비용을 감수하고 이곳을 찾은 이유. 그것은 아마도 “하늘에서 하룻밤”이라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가족과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돌로미티 여행을 계획하신다면, 하루쯤은 문명의 편리함 대신 자연의 웅장함 속에 머물러 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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