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럽의 여름이 주는 시간의 미학
유럽의 여름 여행, 그중에서도 알프스 지역 여행의 가장 큰 실리적 이점은 ‘긴 낮 시간’에 있습니다. 위도가 높은 지리적 특성과 서머타임(Summer Time)의 적용으로 여행자가 활용할 수 있는 가용 시간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7월 코르티나 담페초(Cortina d’Ampezzo) 인근의 일출은 새벽 5시 20분경, 일몰은 저녁 9시 7분경에 이루어집니다. 약 16시간에 달하는 이 긴 낮 시간은 단순히 ‘놀 시간이 많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오후 늦게 대기 불안정으로 날씨가 급변하기 쉬운 산악 지역의 특성을 고려할 때, 이른 새벽부터 시작되는 긴 오전 시간은 안전하고 쾌적한 트레킹을 담보하는 가장 중요한 자산이 됩니다.
2. 아내와 함께 걷는 새벽, 미주리나의 공기를 마시다
새벽 5시, 호텔 창문을 열자 해발 1,754m 고지대 특유의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어 왔습니다. 7월임에도 얇은 바람막이를 챙겨 입어야 할 만큼 쌀쌀했지만,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공기는 더없이 상쾌하고 청량했습니다.

아직 아이들이 잠든 시간, 아내와 함께 조용히 호숫가로 나섰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새벽의 미주리나 호수(Lago di Misurina)는 거대한 거울이 되어 있었습니다. 호수 위로는 밤새 내려앉은 옅은 물안개가 숲과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고, 정박해 있는 목재 보트들은 미동도 없이 물 위에 떠 있었습니다.

타박타박 걷는 발자국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소들의 워낭 소리만이 고요를 채우는 시간. 아내와 나란히 걷는 이 길 위에서, 우리는 별다른 대화 없이도 같은 평온함을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낮 시간의 활기와는 전혀 다른, 오롯이 우리에게만 허락된 자연과의 독대(독대)였습니다.
전날의 장거리 이동으로 쌓인 피로가 있었지만, 이런 광경을 보는 순간 모든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어요. 발걸음을 재촉해 호수가로 나섰습니다. 호수는 마치 거울처럼 고요했고, 물안개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새들의 지저귐과 멀리서 들려오는 소들의 방울 소리만이 이 고요함을 부드럽게 깨뜨렸죠.
과거 이곳은 이탈리아 왕족과 귀족들의 여름 휴양지였으며, 특히 호수 북쪽에 위치한 ‘비오 12세 연구소(Istituto Pio XII)’는 소아 천식 치료 센터로 유명합니다. 해발 1,754m의 건조하고 청정한 공기, 그리고 특수한 미세 기후가 호흡기 질환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침 산책길에 들이마신 그 상쾌한 공기가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3. 황금빛으로 물드는 암봉, 엔로사디라(Enrosadira)
시간이 흐르자 호수 뒤편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소라피스(Sorapiss) 산군과 세 봉우리(Tre Cime)의 남쪽 사면에 아침 햇살이 닿기 시작했습니다. 회색빛 거대한 바위들이 서서히 붉은 황금빛으로 물드는 이 현상을 이곳 사람들은 ‘엔로사디라(Enrosadira)’라고 부릅니다.
호수 수면에 데칼코마니처럼 찍어낸 듯 선명하게 비치는 암봉과 호텔의 반영은 그 자체로 완벽한 조형미를 보여주었습니다. 자연이 빛으로 그려내는 이 장엄한 쇼를 가족과 함께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의 가치는 충분해 보였습니다.


미주리나 호수에는 슬픈 전설이 전해집니다.
거인 왕 소라피스에게는 응석받이 딸 미주리나가 있었습니다. 딸이 요정이 가진 마법 거울을 탐내자, 요정은 왕을 산으로 변하게 하는 조건으로 거울을 줍니다. 아버지가 거대한 바위산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놀란 미주리나는 실족하여 떨어져 죽고, 산이 된 아버지가 흘린 눈물이 모여 지금의 호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4. 에너지 충전, 알프스를 걷기 위한 준비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호텔 식당에는 갓 구운 빵 냄새가 가득했습니다. 평소 이탈리아 도시 여행이었다면 카푸치노 한 잔에 달콤한 크루아상(Cornetto) 하나로 가볍게 아침을 열었겠지만, 이곳 돌로미티에서는 접시를 채우는 방식부터 달라집니다.
접시에는 짭조름한 햄과 치즈, 투박하지만 고소한 곡물 빵, 그리고 부드러운 스크램블 에그가 넉넉히 담겼습니다. 화려한 미식이라기보다는, 거친 산악 지형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투박하고 실용적인 식단입니다.
창밖으로 펼쳐진 웅장한 암봉들을 바라보며 든든하게 배를 채우니, 비로소 “오늘 10km 트레킹도 거뜬하겠다”는 자신감이 차오릅니다. 맛도 맛이지만, 오늘 마주할 대자연을 위해 몸을 깨우는 가장 정직한 연료를 채운 기분입니다.

미주리나 호수에서의 아침은 단순한 휴식이 아닌,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기 위한 의식과도 같았습니다. 폐부 깊숙이 채운 청정한 공기와 든든한 아침 식사로 에너지를 채운 우리는, 이제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를 향해 출발합니다.

✈️ 독자를 위한 여행 정보 (Travel Info)
미주리나 호수 방문을 계획하는 분들을 위해 유용한 정보를 정리했습니다.
1. 교통 및 접근성 (Transportation)
- 위치: 코르티나 담페초에서 차로 약 20~30분 소요됩니다.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로 올라가는 유료 도로의 관문 역할을 하므로, 트레킹 전후에 베이스캠프로 삼기 좋습니다.
- 주차: 호수 주변에 공영 주차장이 있습니다. 다만 7~8월 성수기 낮 시간에는 만차가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저희처럼 아침 일찍 방문하거나 오후 늦은 시간을 추천합니다. 호텔에 숙박할 경우 주차비는 무료입니다.
2. 추천 일정 및 복장 (Itinerary & Tips)
- 옷차림: 사진에서 보시듯 7월 말 한여름에도 아침 기온은 상당히 낮습니다. 일교차가 크므로 바람막이나 경량 패딩을 반드시 챙기셔야 합니다.
- 산책: 호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산책로는 평탄하게 잘 조성되어 있어 약 30~40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습니다. 트레킹 전 가볍게 몸을 풀기에 최적의 코스입니다.
3. 음식 (Dining)
- 호수 주변에는 ‘Pizzeria Edelweiss’나 호텔 내 레스토랑들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산악 지역 특유의 피자, 파스타, 그리고 ‘카네델리(Canederli, 빵과 햄을 뭉쳐 만든 경단 요리)’ 등을 맛볼 수 있습니다. 맑은 날 호수 뷰를 바라보며 에스프레소나 아페롤 스프리츠(Aperol Spritz) 한 잔을 즐기는 여유를 가져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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