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돌로미티의 전략적 요충지, 파소 가르데나(Passo Gardena)
3일 차 일정을 마무리하며 도착한 곳은 해발 2,121m에 위치한 파소 가르데나(Passo Gardena)입니다. 돌로미티 여행에서 ‘파소(Passo)’는 산맥을 넘는 고갯길을 의미하는데, 이곳은 발 가르데나(Val Gardena)와 발 바디아(Val Badia) 두 계곡을 잇는 지리적·관광적 요충지입니다.
이곳에 서면 사방으로 압도적인 풍광이 펼쳐집니다. 남쪽으로는 거대한 성벽 같은 셀라(Sella) 산군이, 북쪽으로는 날카로운 침봉들이 매력적인 치르(Cir) 봉우리들이 호위하듯 서 있습니다. 서쪽으로는 돌로미티의 상징 중 하나인 사솔룽고(Sassolungo)의 웅장한 실루엣이 보입니다. 겨울에는 세계적인 스키 코스인 ‘셀라론다(Sellaronda)’의 핵심 구간이며, 여름에는 사이클리스트와 트레커들의 성지로 변모합니다.

우리의 숙소인 호텔 치르(Hotel Cir)는 이 고갯마루 정점에 위치해 있어, 별도의 이동 없이도 객실과 테라스에서 돌로미티의 일출과 일몰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최적의 입지를 갖추고 있습니다.

[Travel Insight] 돌로미티 드라이브의 정수, 3대 파소(Passo)
돌로미티의 거대한 암봉들을 가장 가깝게 느끼며 달릴 수 있는 방법은 ‘셀라론다(Sella Ronda)’라 불리는 일주 도로를 따라 고갯길을 넘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3대 파소를 정리해 드립니다. 이들은 모두 셀라 산군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 파소 가르데나 (Passo Gardena, 2,121m)
- 연결: 발 가르데나 ↔ 발 바디아
- 특징: 우리가 묵은 곳으로, 돌로미티에서 가장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고개 중 하나입니다. 날카로운 치르 봉우리와 거대한 셀라 성벽 사이를 통과하는 압도적인 개방감이 일품입니다.
- 파소 셀라 (Passo Sella, 2,240m)
- 연결: 발 가르데나 ↔ 발 디 파사
- 특징: 돌로미티의 상징인 **사솔룽고(Sassolungo)**를 가장 가까이서 조망할 수 있는 고개입니다. 암벽 등반가들의 성지이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셀라 타워의 위용은 경이로움 그 자체입니다.
- 파소 포르도이 (Passo Pordoi, 2,239m)
- 연결: 발 디 파사 ↔ 아라바(Arabba)
- 특징: 28개의 헤어핀 커브(굽이길)로 유명한 드라이브 코스입니다. 정상에는 ‘돌로미티의 테라스’라 불리는 사스 포르도이(Sass Pordoi) 케이블카 승강장이 있어, 해발 2,950m에서 돌로미티 전역을 360도로 조망할 수 있습니다.
2. 구름과 암봉이 빚어낸 저녁 산책
체크인을 마친 뒤 가벼운 차림으로 호텔 주변을 산책했습니다. 숙소 정면으로 보이는 셀라(Sella) 산군 쪽으로 조금 올라가보니, 마치 구름 위를 떠다니는 산처럼 보이는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구름이 산군의 허리를 감싸며 흐르는 모습은 이곳이 고산 지대임을 다시금 실감케 했습니다.



저 멀리 봉우리 끝자락이 붉게 물드는 엔로사디라(Enrosadira) 현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라딘어로 ‘장미빛으로 물들다’라는 뜻의 이 현상은 돌로미티 특유의 백운암 지질이 석양의 긴 파장을 반사하며 만들어내는 자연의 마법입니다. 거창한 감탄사보다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며 자연의 속도에 호흡을 맞추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생각을 내려놓고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면 구름이 코끝을 스치며 지나갑니다. 이런 순간이 바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시간이죠.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것이 행복한 인생의 순간이구나”라고 속삭이게 됩니다.


3. 남티롤의 맛
저녁 식사는 호텔 맞은편의 프라라 산장(Rifugio Frara)에서 해결했습니다 [cite: IMG_5880.JPG]. 굴라쉬와 폴렌타, 밀라노식 커틀릿(돈가스와 유사한 형태) 등은 시장기를 달래기에 충분했습니다.

다만, 이 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요리인 카네델리(Canederli)는 다소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음식입니다. 독일어권의 ‘크뇌델(Knödel)’에서 유래한 이 요리는 딱딱해진 빵을 우유와 계란으로 반죽해 치즈, 스펙(훈제 햄), 시금치 등을 섞어 쪄낸 경단입니다. 척박한 산악 지대에서 남은 식재료를 알뜰하게 활용하던 ‘가난한 자들의 요리’에서 시작된 만큼 열량이 높고 식감이 묵직합니다. 익숙하지 않은 분들에게는 다소 속이 더부룩하게 느껴질 수 있으니, 처음 접하신다면 일행과 나누어 맛보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4. 아침의 선물: 치르(Cir) 산군 산책과 셀라의 파노라마
다음 날 아침, 어제 산책한 방향과 반대로 호텔이 등지고 있는 치르(Cir) 산군 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원래는 그란 치르(Gran Cir) 정상까지의 새벽 트레킹을 계획했으나, 가족들의 컨디션을 고려해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가볍게 걷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이른 아침의 공기는 차갑고 맑았습니다. 호텔에서 불과 몇 분만 올라가도 발아래로 파소 가르데나의 굽이치는 도로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고개를 들면 북쪽으로는 치르 산군의 날카로운 암봉들이 웅장한 기세로 서 있고, 남쪽으로는 건너편 셀라 산군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구름의 움직임이었습니다. 밤새 골짜기에 고여 있던 구름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서서히 흩어지며 셀라 산군의 육중한 벽면을 하나씩 드러내는 장면은, 마치 거대한 무대 막이 오르는 것 같은 경외감을 주었습니다.
아침 햇살에 옅은 분홍빛으로 물든 돌덩이들과 그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푸른 하늘의 대비는 그 어떤 인위적인 예술 작품보다 장엄했습니다. 정적 속에서 오직 바람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만이 들리는 이 시간은, 고산 산장에서 숙박하는 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습니다.
5. 창밖이 액자가 되는 식탁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호텔의 아침 식사 장소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습니다. 식당의 넓은 통창은 마치 거대한 액자처럼 돌로미티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아침의 신선한 요거트와 갓 구운 빵, 그리고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은 금세 기운을 북돋워 주었습니다. 화장실 창문 너머로도 사솔룽고의 전경이 보일 만큼, 이곳은 ‘전망’ 자체가 삶의 일부가 되는 공간이었습니다.

6. 에필로그
파소 가르데나에서의 하룻밤은 돌로미티의 거대한 자연 속에 직접 들어와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비록 계획했던 모든 정상을 밟지는 못했어도, 아침 안개 속에서 마주한 셀라 산군의 파노라마와 아내와 함께한 고요한 산책만으로도 충분히 완결된 아침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름을 뚫고 또 다른 돌로미티의 심장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Trekker’s Info] 그란 치르(Gran Cir)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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