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준비하며 지도를 펼쳤을 때, 가장 난해했던 곳이 바로 알페디시우시(Alpe di Siusi)였습니다. 흔히 자이저 알름(Seiser Alm)이라는 독일어 명칭과 혼용되어 쓰이는데, 처음에는 서로 다른 장소인 줄 알고 헷갈리기도 했습니다.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독일어와 이탈리아어가 공용어로 쓰이는 이곳의 특성상 이름만 다를 뿐, 두 지명은 완전히 같은 곳을 가리킵니다.
워낙 광활한 고원이다 보니 진출입로가 다양하고, 리프트와 버스 등 이동 수단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수십 가지의 루트가 나옵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곤돌라를 타고 올라와 평화로운 알페디시우시의 고원을 가볍게 산책하고 내려갑니다. 하지만 저희는 조금 다른, 어찌 보면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선택을 했습니다. 바로 이 광활한 고원을 가로질러 저 높은 쉴리어(Sciliar) 산군의 정상, 해발 2,457m 볼차노 산장까지 오르는 ‘하드 트레킹’입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진짜 돌로미티의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편안한 관광 대신 땀방울을 선택한 저희 가족의 4일 차 횡단 기록을 공유합니다.
1. 알페디시우시, 그 웅장한 고원의 세계
알페디시우시는 해발 1,680m에서 2,350m 사이에 위치한 유럽 최대 규모의 고산 목초지입니다. 면적만 무려 56㎢에 달해 축구장 8,000개를 합친 것과 맞먹는 광활함을 자랑합니다.
이곳은 단순히 넓은 초원이 아닙니다. 360도 어디를 둘러봐도 돌로미티의 걸작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동쪽으로는 웅장한 사쏘룽고(Sassolungo)와 사쏘피아토(Sassopiatto)가, 서쪽으로는 알페디시우시의 상징인 쉴리어(Sciliar/Schlern) 산군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냅니다. 남쪽 멀리로는 로젠가르텐(Rosengarten) 산군까지 조망할 수 있어, 그야말로 ‘돌로미티의 파노라마’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 접근하는 주된 방법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 오르티세이(Ortisei) 출발: Mont Seuc 곤돌라 이용 (북쪽 진입)
- 시우시(Siusi) 출발: Seiser Alm 곤돌라 이용 (서쪽 컴파치 진입)
- 산타 크리스티나(Santa Cristina) 출발: 몬테 파나(Monte Pana) 주차장에서 531번 셔틀버스 이용 (동쪽 살트리아 진입)
- 참고: 발 가르데나 지역에서 살트리아(Saltria)로 바로 접근할 때 유용합니다.
저희는 오르티세이에서 출발하여 고원을 가로지르는 1번 루트를 택했습니다. 전체적인 지형을 조망하며 들어가기에 가장 드라마틱한 진입로입니다.
2. 출발: Mont Seuc 곤돌라
오전 10시, 오르티세이의 Mont Seuc 승강장은 이미 만원입니다. 단체 여행객과 등산객들이 뒤섞인 활기찬 풍경입니다.

곤돌라에서 내리자마자 마주하는 풍경은 압도적입니다. 좌측으로는 뾰족한 사쏘룽고 형제들이, 우측으로는 쉴리어 산군이 시야를 꽉 채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 포토존에서 인증샷을 남깁니다.

이 웅장한 풍경 아래, 그림처럼 자리 잡은 건물이 눈에 띕니다. 바로 스포트호텔 손네(Sporthotel Sonne)입니다. 알페디시우시를 대표하는 4성급 호텔로, 엽서에서나 볼 법한 이국적인 풍광 덕분에 트레커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곳입니다. 걷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만나는 이 평화로운 모습은 앞으로 펼쳐질 여정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줍니다.

[참고] 당초 계획했던 루트와 예상 소요 시간
트레킹을 준비하시는 분들을 위해, 제가 한국에서 미리 계획했던 구간별 소요 시간을 공유합니다. 현지 상황이나 체력에 따라 실제 시간은 달라질 수 있으니 참고용으로 활용하세요.
- 최종 목적지: 볼차노 산장 (Rifugio Bolzano)
- 총 예상 소요 시간: 약 5.5시간 (순수 이동 시간 기준)
[구간별 상세 정보]
- Mont Seuc 산악역 ~ Saltria: 1시간 (Trail 9, 내리막)
- Saltria ~ Hotel Steger Dellai: 1시간 30분 (Rauchhütte, Gostner Schwaige 경유)
- Hotel Steger Dellai ~ Baita Sanon: 40분
- Compatsch ~ Saltnerhütte: 1시간
- Saltner Hütte ~ Rifugio Bolzano: 2시간 (난이도 최상, 고도 600m를 치고 올라가는 힘든 구간)
이 데이터는 계획 단계의 수치이며, 실제로는 휴식, 사진 촬영, 길 찾기 등으로 인해 시간이 더 소요될 수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볼차노 산장으로 오르는 구간은 체력 소모가 극심하므로 여유 시간을 두는 것이 좋습니다. 라는 정도의 정보를 트레킹을 시작하였습니다.



https://www.moonhoneytravel.com/alpe-di-siusi-rifugio-bolzano-hike-dolomites/
4. Mont Seuc에서 Saltria까지
저희의 1차 목표는 고원 아래쪽 거점인 살트리아(Saltria)였습니다. 이곳으로 가는 방법은 리프트를 타거나 걸어서 내려가는 것(Trail 9)입니다. 저희는 체력을 과신하며 걷기를 택했습니다.

하지만 이 길을 걸었기에 알페디시우시의 진정한 주인, 사쏘룽고(Sassolungo)와 사쏘피아토(Sassopiatto) 형제를 정면에서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 두 봉우리는 알페디시우시 어디에서나 보이는 랜드마크지만, 이렇게 초원과 눈높이를 맞추며 다가갈 때 그 웅장함이 배가됩니다.

왼쪽에 우뚝 솟은 사쏘룽고(3,181m)가 거칠고 수직적인 남성미를 뽐낸다면, 그 옆의 사쏘피아토(2,969m)는 이름(Piatto=Flat)처럼 한쪽 면을 긴 칼로 대각선으로 베어버린 듯한 독특하고 매끄러운 사면을 자랑합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 위에 솟아오른 이 회백색 바위 성채들의 조화는, 걷는 내내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볼차노 산장까지 가는 것이 목표라면 이 구간은 리프트를 이용하거나 체력을 최대한 아끼시길 권합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초원과 바위산의 조화는 훌륭했지만, 1시간 동안의 하산은 생각보다 무릎과 체력을 갉아먹습니다. 트레킹은 ‘선택과 집중’입니다. 보여지는 풍경이 비슷하다면, 에너지는 가장 힘든 구간을 위해 비축해야 합니다.

5. 궤도 수정: 컴파치(Compatsch)로의 이동
살트리아에 도착했을 때, 저희는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무리하게 걷기보다는 알름버스(Almbus)를 이용해 고원의 중심지인 컴파치로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이는 이날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정보] 알페디시우시 셔틀버스 (Almbus 11번) 핵심 정보
알페디시우시 내부(Saltria ↔ Compatsch)를 연결하는 유일한 대중교통인 11번 버스는 트레커들의 다리 역할을 합니다. 일반적인 남티롤 게스트 패스가 적용되지 않는 구간이므로 아래 정보를 미리 확인하세요.
[참고] 렌트카 여행자를 위한 중요 정보 (2025 최신 규정)
만약 렌트카로 컴파치까지 직접 올라오실 계획이라면, 알페디시우시 자연보호구역의 엄격한 교통 통제 규정을 반드시 준수해야 합니다. 위반 시 높은 벌금이 부과될 수 있습니다.
- 일반 차량 통행 제한 (필독)
- 통행 금지 시간: 오전 09:00 ~ 오후 17:00 (St. Valentin의 산림 통제소부터 진입 불가)
- 진입 가능 시간: 오전 09:00 이전 또는 오후 17:00 이후에만 컴파치 주차장까지 진입 가능.
- 주의: 오전 9시 이전이라도 주차장이 만차일 경우 조기 통제될 수 있습니다.
- 주차 정보 (P2 Car Park Compatsch)
- 위치: 컴파치에 위치한 유료 주차장 (P2)
- 요금: € 30.00 / 일 (신용카드 또는 현금 결제 가능)
- 야간 주차 금지: 자연 보호를 위해 23:00 ~ 06:00 사이에는 주차장 내 주차가 금지됩니다.
- 예외 대상 (숙박객 및 장애인)
- 알페디시우시 내 숙박객: 체크인/아웃 당일은 시간 관계없이 통행 가능. 투숙 기간 중에는 오전 10:00 이전, 오후 17:00 이후에만 이동 가능합니다. (호텔에서 발급해주는 허가증 필요)
- 장애인 (Blue Badge 소지자): 유럽 장애인 주차증 소지자는 언제든 통행 가능하며, 컴파치 내 지정 구역에 무료 주차 가능합니다. (만차 시 P2 주차장은 유료)
- 비수기 예외: 리프트가 운행하지 않는 비수기(보통 4월 중순~5월 중순, 11월 초~12월 초)에는 하루 종일 개인 차량 통행이 허용되며, 주차비는 약 절반(€14.00) 수준으로 인하됩니다.


6. 본격적인 등반: 볼차노 산장을 향하여
컴파치에서 ‘파노라마 리프트’를 타고 이동한 뒤,


알펜호텔 파노라마(Alpenhotel Panorama)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했습니다. 리프트 하차장 바로 옆에 위치한 이 호텔은 이름 그대로 시원하게 펼쳐진 고원의 전망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컴파치에서 접근성이 좋아 많은 트레커들이 이곳을 베이스캠프 삼아 점심을 먹거나 숨을 고른 뒤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합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승부처입니다. 목적지인 볼차노 산장(Rifugio Bolzano)은 저 멀리 보이는 산 정상, 까마득한 높이에 위치해 있습니다.
경로: Panorama Hotel → Laurin Hütte → Trail 6/10 → Rifugio Bolzano 난이도: 상 (고도 약 600m 이상 상승)


‘Snowpark Seiser Alm’이라는 표지판인데, 지금은 푸른 초원 위에 덩그러니 서 있는 구조물이 낯설게 느껴지지만, 이곳은 겨울이 되면 이탈리아 최고의 스노우파크로 변신하여 스키어와 스노우보더들의 성지가 되는 곳입니다. 계절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알페디시우시의 이중적인 매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자연이 주는 위로와 시련
고도를 높일수록 숨은 턱 끝까지 차오릅니다. 하지만 그 힘겨운 길을 위로해 주는 것은 발밑의 작은 생명들이었습니다.

바람에 하늘거리는 하얀 솜털의 황새풀, 보라색 종 모양의 초롱꽃(Campanula), 그리고 서양톱풀과 스카비오사가 척박한 돌길을 수놓고 있었습니다. 특이하게도 한국에서는 생태계 교란종으로 분류되어 미움을 받는 서양금혼초가 이곳에서는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며 알프스의 일원으로 당당히 자리 잡고 있더군요. 장소가 바뀌면 가치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이 작은 야생화들에서 배웁니다.





이런 자연의 선물들과 함께 가끔 마주치는 계곡물은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습니다.

트레킹 중 예상치 못한 ‘검문’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좁은 외길을 막고 선 말 한 마리가 떡하니 막고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뒷발에 채일까 두려워 20분 넘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그때, 반대편에서 내려오던 한 무리의 일행이 구세주처럼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달리 과감하게 말 곁으로 다가가 자연스럽게 이동을 유도했고, 거짓말처럼 말들이 길 아래쪽으로 비켜주더군요. 익숙하지 않은 동물 앞에서 쩔쩔매던 우리에게 그들의 등장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알페디시우시에서는 동물이 주인이고 우리는 잠시 들른 손님일 뿐임을, 그리고 때로는 타인의 용기가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배운 순간이었습니다.
7. 정상에서의 보상: 쉴리어(Sciliar) 능선
예상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던, 끝이 보이지 않는 힘겨운 오르막 끝에 드디어 능선에 올라섰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우리가 걸어온 알페디시우시의 광활한 대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사쏘룽고와 사쏘피아토가 이제는 눈높이에서 우리를 마주 봅니다.



그리고 능선 너머 정면으로는 또 다른 거인, 로젠가르텐(Rosengarten/Catinaccio) 산군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독일어로 ‘장미 정원’이라는 뜻을 가진 이 산군은 이름처럼 낭만적인 전설을 품고 있습니다. 뾰족하게 솟은 암봉들이 마치 거대한 성벽처럼 펼쳐져 있는데, 해 질 녘이면 이 회색 바위들이 붉은 장미빛으로 물드는 ‘엔로사디라(Enrosadira)’ 현상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의 뷰는 알페디시우시의 평지에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머무는 고원 아래쪽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풍경이었습니다. 편안한 산책 대신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하드 트레킹을 선택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죠.



그리고 마침내, 오늘의 종착지 볼차노 산장이 위엄 있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오후 6시 조금 전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대략 8시간이 소요되었고, 거리로는 20km였습니다.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능선 위에서 바라보는 360도 파노라마 뷰는 땀방울의 가치를 증명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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