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에스 호수에서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다음 목적지인 프라토피아자(Prato Piazza/Plätzwiese)로 향했습니다. 해발 2,000m에 위치한 고원인 만큼 날씨 변수가 클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차창 밖으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뒷좌석의 대학생 아들들이 “비 오는데 정말 올라가요?”라며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산악 지역의 날씨는 국지적으로 변한다는 점,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기엔 아쉽다는 점을 들어 일단 현장까지 가보고 결정하자고 설득했습니다. 성인 4명 팀의 장점은 상황에 따라 빠르게 태세를 전환할 수 있다는 기동성이니까요.
1. 교통 통제의 배경: 지속 가능한 여행을 위한 불편함
프라토피아자로 향하는 길, 우리는 시간을 수시로 확인해야 했습니다. 사전에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이곳 역시 브라이에스 호수처럼 강력한 교통 통제(Traffic Ban)가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행 전 자료를 조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7월부터 9월 사이 성수기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개인 차량의 진입이 엄격히 통제됩니다. 팬데믹 이후 급증한 관광객으로 인한 환경 파괴와 주민들의 불편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합니다. 일종의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에 대한 방어 기제인 셈입니다.
저희는 이 규제를 피해 오후 4시 이후에 진입하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다행히 4시가 지나자 차단기가 열렸고, 통행료(약 10유로)를 지불한 뒤 자차로 해발 2,000m 주차장까지 편하게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통행료가 다소 비싸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비용이 환경 보전과 셔틀버스 운영 등에 재투자되는 지속 가능한 관광의 비용이라고 생각하니 납득이 되었습니다.
2. 돌로미티의 발코니에 서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다행히 비가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습니다. 프라토피아자는 파네스-세네스-브라이에스 자연공원 내에 위치한 드넓은 고원입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사방이 트인 개방감이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 파네스-세네스-브라이에스 자연공원 (Fanes-Sennes-Prags Nature Park)
브라이에스 호수와 프라토피아자가 속한 이곳은 1980년에 지정된 남티롤(Südtirol)의 대표적인 자연공원이자, 2009년 등재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돌로미티의 핵심 지역 중 하나입니다.
거대한 카르스트 고원인 파네스(Fanes)와 세네스(Sennes), 그리고 에메랄드빛 호수를 품은 브라이에스(Braies/Prags) 지역을 합쳐 명명되었습니다. 약 25,000헥타르에 달하는 광활한 면적을 자랑합니다. 이곳은 ‘카르스트 지형의 교과서’라 불린다고 합니다. 석회암이 물에 녹아 형성된 독특한 지형과 함께, 5만 년 전 알프스에 서식했던 동굴곰(Ursus ladinicus)의 화석이 발견된 곳으로도 유명하다네요. 현지 라딘(Ladin) 사람들에게 이곳은 단순한 자연이 아닌 신화의 공간입니다. 고대 ‘파네스 왕국(Kingdom of Fanes)’의 전설이 깃든 곳으로, 트레킹 중에 마주치는 웅장한 바위 의자 같은 지형은 ‘마못 의회(Parliament of Marmots)’라는 재미있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답니다.
즉, 우리가 걷는 이 길은 수만 년의 지질학적 시간과 오래된 전설이 겹겹이 쌓인 역사의 현장인 셈입니다.
가이드북에서 읽은 대로 이곳은 ‘돌로미티의 발코니’라 불릴 만했습니다. 피코 디 발란드로(Dürrenstein)와 크로다 로사(Croda Rossa) 같은 거대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으니까요. 특히 ‘붉은 산’이라는 뜻의 크로다 로사는 이름처럼 붉은 암벽이 인상적이었는데, 현지 전설에는 이것이 용의 피가 묻은 흔적이라고 전해진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암석 내 철 성분이 산화된 결과겠지만, 흐린 날씨 덕분에 붉은 빛이 더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3. 대학생 아들들과의 트레킹
날씨가 언제 변할지 모르니 서둘러 트레킹을 시작했습니다. 목표는 주차장에서 발란드로 산장(Rifugio Vallandro)을 거쳐 몬테 스페치에(Monte Specie) 전망대까지 왕복하는 약 8.8km 코스였습니다.
- 이동 경로: 주차장 → 발란드로 산장 → 몬테 스페치에 (왕복)
- 프라토피아자 주차장 → 리푸지오 프라토피아자 (5분)
- 리푸지오 프라토피아자 → 말가 프라토피아자 (30분)
- 말가 프라토피아자 → 트레일 34/40a 교차점 (15분)
- 트레일 34/40a 교차점 → 몬테 스페치에 (50분~1시간)
- 몬테 스페치에 → 리푸지오 발란드로 → 리푸지오 프라토피아자 (1시간 30분)
- 난이도: 쉬움 (평탄한 고원 길)
이 코스의 가장 큰 장점은 경사가 완만하다는 것입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급경사가 없다 보니, 걷는 내내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기가 수월했습니다. 평소 각자 바빠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었던 대학생 아들들과 진로, 미래에 대한 고민을 가볍게 주고받으며 걷기에 최적의 코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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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상 악화와 의사결정: 매몰 비용 무시하기
하지만 자연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중간 기점인 발란드로 산장이 시야에 들어올 무렵, 빗줄기가 급격히 굵어지더니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평화롭게 풀을 뜯던 소들도 불안한 듯 움직임이 부산해졌습니다.


개방된 고원 지대에서 낙뢰는 치명적인 위험 요소입니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판초 우의를 입고 강행할 것인가, 아니면 안전하게 철수할 것인가?”
이때 큰아들이 먼저 의견을 냈습니다. “아빠, 무리하지 말고 내려가죠. 내일 더 좋은 날씨에 더 멋진 곳을 가면 되잖아요.”
경제학에서 말하는 매몰 비용(Sunk Cost)의 오류에 빠지지 않는 현명한 판단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온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비합리적입니다. 우리는 즉시 발길을 돌려 하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참고] 트레커를 위한 안전 메모
여행 후 정리하며 알게 된 여름철 돌로미티 트레킹 시 뇌우 대처법을 공유합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두시면 좋겠습니다.
- 30-30 규칙: 번개가 친 뒤 30초 이내에 천둥소리가 들리면 즉시 대피하고, 마지막 천둥소리가 난 후 30분간 기다려야 합니다.
- 지형 주의: 프라토피아자 같은 평원은 사람이 피뢰침 역할을 할 수 있어 낙뢰 시 매우 위험합니다. 숲이나 산장으로 즉시 대피해야 합니다.
- 장비 관리: 스틱(트레킹 폴) 등 금속 장비는 배낭에 넣거나 몸에서 멀리 떨어뜨려야 합니다.
5. 미주리나 호수에서의 휴식
비를 피해 차로 돌아온 우리는 젖은 옷을 대충 정리하고 숙소인 그랜드 호텔 미주리나로 이동했습니다.
이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시설이 조금 낡았다는 평이 있었지만, 다음 날 예정된 돌로미티의 하이라이트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 트레킹의 진입 톨게이트와 가장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트레 치메 주차장은 금방 만차되기 때문에 오픈런이 필수인데, 이곳은 베이스캠프로서 최적의 위치였습니다.
비록 계획했던 몬테 스페치에 정상에는 닿지 못했지만, 돌로미티의 변덕스러운 자연을 직접 체감하고 가족과 함께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려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하루였습니다. 내일은 날씨가 맑기를 기대하며, 호텔 마트에서 산 간단한 저녁거리로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호텔 정보:
- 그랜드 호텔 미주리나는 해발 1,754m에 위치
- 미주리나 호수와 트레 치메 디 라바레도(세 봉우리) 전망
- 체크인: 오후 3시, 체크아웃: 오전 10시
- 레스토랑, 바, 스파 및 웰니스 센터 보유
- 무료 주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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