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08] 예술과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피렌체에서의 하루

느즈막이 일어난 아들과 함께 호텔에서 제공하는 조촐하지만 정갈한 아침 식사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갓 구운 빵과 신선한 계란, 아삭한 샐러드와 햄, 그리고 풍미 깊은 치즈와 향긋한 커피 한 잔. 이 정도면 오늘 하루, 피렌체의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기 위한 에너지로 충분합니다.

식사를 마치고 새벽 산책길과 같은 경로로 다시 길을 나섭니다. 비록 두 번째 걷는 길이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벌써 익숙한 동네가 되어버린 듯 편안함이 느껴집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에 살았던 사람처럼 아들에게 길을 안내하며 발걸음을 옮깁니다.

1. 산타시마 안눈치아타 성당 (Basilica della Santissima Annunziata)

가장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새벽에 잠시 스쳐 갔던 산타시마 안눈치아타 성당입니다.

겉모습은 피렌체의 다른 화려한 건축물들에 비해 다소 소박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반전의 미학이 펼쳐집니다.

내부는 온통 황금빛으로 가득 차 있어, 마치 천상의 빛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천장을 장식한 육중한 황금 조각들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압도적인 화려함을 자랑합니다. 오히려 천장화가 소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금박 장식의 밀도가 대단했습니다.

이곳의 독특한 점은 제단 뒤편에 위치한 ‘로톤다(Rotonda)’라는 원형 공간입니다. 미켈로초(Michelozzo, 1396~1472)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가 설계에 참여한 이 공간은 일반적인 성당 구조와 달리 제단 뒤로 돌아 들어가 관람할 수 있어, 정면이 아닌 후면에서 성당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각적 경험을 선사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의 수태고지(Annunciation) 프레스코화는 화가가 잠든 사이 천사가 완성했다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2.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Duomo di Firenze)

다시 길을 나서 피렌체의 심장,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두오모)으로 향했습니다. 새벽의 선선했던 공기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7월의 태양이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두오모의 위용은 그 더위마저 잊게 만듭니다.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가 설계한 거대한 돔과 조토(Giotto di Bondone, 1267?~1337)의 종탑, 그리고 녹색, 분홍색, 흰색 대리석이 어우러진 외관은 언제 봐도 피렌체의 랜드마크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가 보는 이 화려한 정면(파사드)이 성당 몸체보다 훨씬 늦은 19세기에 완성되었다는 점입니다. 수 세기 동안 미완성으로 남아있던 얼굴을 1887년에 건축가 에밀리오 데 파브리스(Emilio De Fabris, 1807~1883)가 네오고딕 양식으로 완성했죠. 카라라의 흰색, 프라토의 초록색, 마렘마의 분홍색 대리석을 사용하여 이탈리아의 통일과 토스카나의 자부심을 화려하게 표현했습니다.

성당 주변을 돌던 중, 마침 오전 미사가 진행되고 있어 경찰들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미사 참여 의사를 밝히니 흔쾌히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화려한 외관과 달리 성당 내부는 의외로 소박하고 엄숙합니다. 조금 전 보고 온 안눈치아타 성당의 황금빛 향연과는 대조적으로, 거대한 공간 자체가 주는 웅장함 외에는 장식을 절제한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역사적인 이유가 숨어 있습니다. 우선, 이 거대한 공간이 주는 공허함(Emptiness) 그 자체를 통해 인간의 장식보다는 신의 위대함을 드러내고자 했던 당시의 종교적 미학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또한, 한때 이곳 강단에서 피렌체 시민들을 향해 ‘허영의 소각’을 외쳤던 도미니코회 수도사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의 영향도 큽니다. 사치와 향락을 죄악시하고 엄격한 청빈을 강조했던 그의 사상이 성당 내부의 분위기에도 깊은 흔적을 남긴 셈입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브루넬레스키의 돔 안쪽을 올려다보는 순간, 숨 막히는 반전을 마주하게 됩니다. 소박한 벽면과 달리, 천장은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와 페데리코 추카리(Federico Zuccari, 1540~1609)가 그린 거대한 프레스코화 ‘최후의 심판’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입니다. 3,600제곱미터에 달하는 이 압도적인 그림 속에는 천국으로 오르는 영혼과 지옥으로 떨어지는 영혼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인간들에게 경외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줍니다. 텅 빈 공간 끝에 펼쳐진 이 화려한 천장화는 마치 ‘지상의 절제 끝에 천상의 영광이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듯했습니다.

성당 맞은편 산 조반니 세례당에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가 “천국의 문”이라 극찬했던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의 황금 문이 빛나고 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정교한 부조로 새겨 넣은 이 문은 르네상스 조각의 걸작 중 하나입니다.

3. 점심: 알 안티코 비나이오 (All’Antico Vinaio)

금강산도 식후경, 어느덧 점심시간입니다. 우리는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파니니 가게인 ‘알 안티코 비나이오’를 찾았습니다. 명성답게 가게 앞은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운 좋게 실내 테이블을 잡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뜨거운 햇살 아래 길거리에 걸터앉아 파니니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갓 구운 바삭한 스키아치아타 빵(Schiacciata) 속에 신선한 햄과 치즈, 트러플 크림 등을 가득 채운 파니니는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이탈리아의 풍미가 입안 가득 퍼집니다. 양도 어찌나 푸짐한지, 하나를 다 먹고 나니 배가 든든하게 차오릅니다. 맛과 가성비, 그리고 현지의 활기찬 분위기까지 모두 잡은 만족스러운 점심이었습니다. (3개 28유로)

4. 산타 크로체 성당 (Basilica di Santa Croce)

오후 일정의 시작은 산타 크로체 성당입니다. (입장료: 성인 10유로, 대학생 6유로) 이곳은 단순한 성당을 넘어 ‘이탈리아의 영광을 기리는 사원(Tempio dell’Itale Glorie)’이라 불립니다. 내부에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와 함께 역사를 바꾼 위인들의 무덤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성당 한편에는 생각에 잠긴 듯한 거대한 조각상이 눈에 띕니다. 바로 ‘신곡’을 쓴 피렌체의 가장 위대한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의 기념비(Cenotaph)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거대한 무덤은 텅 비어 있습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당해 객지인 라벤나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입니다. 뒤늦게 피렌체가 그의 유해를 돌려받으려 했지만, 라벤나의 거부로 결국 빈 무덤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습니다. 성당 밖 광장에 서 있는 단테의 동상이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던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특히 우리 부부가 시오노 나나미의 에세이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읽으며 깊은 감명을 받았던, 바로 그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의 무덤 앞에 섰을 때는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책을 통해 만난 그는 흔히 알려진 냉혹한 권모술수의 대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약소국 피렌체의 생존을 위해 강대국 사이를 뛰어다니며 고뇌했던, 누구보다 피렌체를 사랑했던 뜨거운 애국자였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추방과 복귀, 공화정의 흥망성쇠라는 격동의 역사 속에서 관직에서 쫓겨나 시골에서 은둔하며 ‘군주론’을 집필할 때조차, 그의 마음은 언제나 피렌체의 번영을 향해 있었을 것입니다. 살아서는 그토록 원하던 공직 복귀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쓸쓸히 생을 마감했지만, 죽어서는 ‘어떤 칭송으로도 그 위대함을 다 표현할 수 없다(Tanto nomini nullum par elogium)’는 헌사를 받으며 미켈란젤로, 갈릴레이와 같은 거장들과 나란히 잠들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외쳤던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1475~1564), 작곡가 로시니(Gioachino Rossini, 1792~1868) 등 교과서에서만 보던 인물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어 성당 전체가 거대한 판테온과 같은 엄숙함을 줍니다. 또한 성당 곳곳에는 1966년 피렌체 대홍수 당시 물이 찼던 높이를 표시한 흔적들이 남아있어,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와 이를 극복해낸 시민들의 노력을 짐작게 합니다.

예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인데, 특히 ‘서양 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토(Giotto di Bondone, 1267?~1337)의 프레스코화(바르디 예배당과 페루치 예배당)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의 그림이 미술사적으로 위대한 이유는, 이전까지 주를 이루던 딱딱하고 평면적인 비잔틴 양식에서 벗어나 인물에게 ‘생명’을 불어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림 속 성인들은 더 이상 근엄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슬퍼하고 기뻐하는 인간적인 감정을 가진 존재로 묘사됩니다. 또한 원근법을 시도하여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냄으로써, 평면의 벽을 뚫고 마치 우리가 그 현장에 있는 듯한 입체감을 선사했습니다. 훗날 미켈란젤로조차 이곳을 찾아와 그의 그림을 따라 그리며 연구했다고 하니, 르네상스 미술의 진정한 시작점이 바로 여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비록 세월의 흔적으로 복원 작업이 한창이었지만, 그 혁신적인 붓터치를 직접 마주하는 감동은 여전했습니다.

성당 내부 관람 후 측면으로 나오면 고요한 정원과 함께 ‘파치 예배당(Cappella dei Pazzi)’이 나타납니다. 브루넬레스키(1377~1446)가 설계한 이 건물은 완벽한 비례와 균형미를 자랑하는 르네상스 건축의 정수입니다. 화려한 장식 없이도 공간 그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에 취해 이곳에서만 2시간 넘게 머물렀습니다.

5.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 스트로치 궁전

다음으로 향한 곳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입니다. 알베르티(1404~1472)가 설계한 기하학적인 파사드가 인상적인 곳입니다. 성당 정면에는 특이한 장치가 눈에 띄는데, 바로 천문학자 이냐치오 단티(Ignazio Danti, 1536~1586)가 설치한 해시계와 천문 관측 기구입니다. 르네상스 시대, 과학과 예술이 어떻게 융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내부로 들어서니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빛을 투과하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이어서 방문한 스트로치 궁전(Palazzo Strozzi)은 피렌체 귀족 저택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외벽은 거친 돌을 그대로 살린 ‘루스 티카(Rustica)’ 양식으로 마감되어 웅장하고 단아한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특히 건물 외벽 아래를 두르고 있는 긴 돌 벤치, ‘판카 디 비아(Panca di via)’가 인상적입니다. “거리의 벤치”라는 뜻인데, 당시 궁전 주인이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권위적인 외관 속에 숨겨진 배려심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외벽 상단에 박힌 거대한 쇠고리 장식(Ferri)들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입니다. 전설적인 대장장이 니콜로 그로소(Niccolò Grosso), 별명으로 ‘일 카파라(Il Caparra)’라 불렸던 장인의 작품입니다. 횃불을 꽂거나 말고삐를 매던 실용적인 도구에 양파나 용(Dragon) 같은 모양을 불어넣어 예술품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거친 외관과 달리 안으로 들어서면 우아하고 균형 잡힌 르네상스식 중정(Courtyard)이 나타납니다. 현재는 현대 미술 전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어, 수백 년 전의 고전 건축물 안에서 파격적인 현대 예술을 감상하는 시공간을 초월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6. 베키오 궁전과 우피치 미술관, 그리고 아르노 강

다시 시뇨리아 광장을 지나 베키오 궁전(시청사) 앞을 지납니다. 낮에 다시 보니 어젯밤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디테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건물 외벽에 걸린 문양들은 피렌체 공화국의 역사를 상징하는 국기와 문장들입니다. 붉은 백합 문양(Giglio)은 피렌체의 자부심을 상징하죠.

우피치 미술관 앞을 지나며 잠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세계적인 명작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산타 크로체에서 너무 깊이 빠져 있었던 탓에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게다가 아들이 빨리 노을을 보러 가자고 보채는 바람에, 이번 여행에서는 아쉽지만 외관만 눈에 담기로 했습니다.

7. 베키오 다리와 미켈란젤로 언덕의 황홀한 노을

아르노 강을 가로지르는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를 건넜습니다. 멀리서 볼 때는 그저 오래된 다리 같았는데, 막상 건너보니 다리 위에 빼곡히 들어선 보석 상점들이 별천지를 이룹니다. 화려한 쇼윈도 속 보석들을 아이쇼핑하며 다리를 건너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이제 오늘의 하이라이트, 미켈란젤로 언덕을 향해 걷습니다. 약 30분 정도 걸어 올라가는 길은 쉽지 않았지만, 정상에 도착하는 순간 모든 피로가 씻은 듯 사라졌습니다. 인터넷에서 다른 야경 명소들도 찾아보았지만, 역시나 ‘구관이 명관’입니다. 피렌체 전경을 한눈에 담기에는 이곳만 한 곳이 없습니다.

광장 중앙에는 다비드상의 청동 모조품이 서 있고, 계단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습니다. 야외 공연이 펼쳐지는 가운데, 붉게 물드는 노을이 피렌체의 지붕들을 감싸 안았습니다. 붉은 돔의 두오모, 베키오 다리, 그리고 강물 위로 반짝이는 조명들이 어우러져 황홀한 야경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는 그 아름다운 순간을 놓칠세라 연신 셔터를 눌렀습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어둠이 내려앉은 뒤에야 언덕을 내려왔습니다. 다시 피렌체 시내를 관통하여 숙소 근처 피자집에서 피자 두 판을 뚝딱 해치우며, 피렌체에서의 마지막 밤을 든든하고 아쉽게 마무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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