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6시 30분. 신발 끈을 단단히 동여매고 아내와 함께 밀라노의 새벽 공기를 마시러 숙소를 나섰습니다. 피렌체에서와 마찬가지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이 도시의 가장 상쾌하고 솔직한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일부러 도심 한복판에 숙소를 잡은 덕분입니다.
관광객들이 잠든 사이, 밀라노의 아침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1. 트램, 도시의 낭만인가 비효율의 유산인가?
숙소를 나와 거리를 걷다 보면, 아침부터 도로를 가로질러 이동하는 노란색 트램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사실 현대적인 대도시의 관점에서 보면 트램은 다소 의아한 운송수단일 수 있습니다. 도로 폭은 좁아지고, 신호 체계는 복잡해지며, 속도 또한 빠르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여행자에게 이 덜컹거리는 트램만큼 매력적인 이동 수단은 없습니다. 천천히 차창 밖 풍경을 눈에 담으며 도시를 유영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문득 궁금해서 찾아보니, 밀라노의 트램(특히 구형 ‘Ventotto’ 모델)은 1920년대부터 운행된, 그 자체로 ‘움직이는 문화유산’이라고 합니다. 샌프란시스코나 리스본처럼 밀라노 사람들에게 트램은 단순한 교통수단을 넘어 도시의 정체성 그 자체인 셈이죠.
효율성만을 따진다면 진작에 사라졌어야 할 유물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좁은 도로 위에서 자동차와 보행자, 그리고 트램이 아슬아슬하게 공존하는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속도’만이 도시의 미덕은 아니라는 것. 조금은 불편하고 느리더라도, 옛것을 지키며 그들만의 속도로 호흡하는 것이야말로 밀라노가 가진 진짜 매력이 아닐까요?
2. 출근길이 런웨이, ‘벨라 피구라(Bella Figura)’의 도시
대성당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목요일 이른 아침이라 관광객보다는 출근하는 현지인들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동안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에서 마주쳤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말 그대로 ‘세련된 도시인’의 전형이었습니다.
남자들은 몸에 딱 떨어지는 짙은 남색 슈트에 넥타이를 매지 않은 채 자전거를 타거나 트램을 기다리고, 여자들 역시 화려하진 않지만 기품 있는 오피스 룩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에는 ‘벨라 피구라(Bella Figura)’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직역하면 ‘아름다운 형상’이지만, 실제로는 ‘남에게 흐트러짐 없는 좋은 인상을 주는 태도’를 뜻하는 그들의 삶의 방식이라더군요.
자전거를 타고 가는 중년 신사의 슈트 자락이 휘날리는 모습을 보며, 왜 밀라노를 패션과 경제의 중심지라 부르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멋짐은 단순히 비싼 옷을 입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일상과 직업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역시,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멋쟁이들의 도시, 밀라노는 실재했습니다.
3. 600년의 집념이 빚어낸 레이스, 밀라노 대성당(Duomo)
드디어 마주한 새벽의 대성당. 낮의 번잡함이 사라진 고요한 광장에서 마주한 두오모는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사람이 뜸한 틈을 타 성당 주변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아보았습니다. 특히 성당 후면(Apse)의 거대한 채광창과 벽면을 가득 채운 조각들은 마치 돌로 짠 레이스처럼 정교했습니다.


공부해 본 바로는 이 성당을 짓는 데 무려 600년 가까이 걸렸다고 합니다. 1386년에 착공해 나폴레옹 시대를 거쳐 1965년에야 마지막 청동 문이 완성되었다니, 인간의 집념이 실로 무섭게 느껴집니다.
문득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가능하게 했던 힘의 원천이 궁금해졌습니다. 막강한 교황의 권력이나 왕의 명령 때문이었을까요? 하지만 자료를 보니 의외로 밀라노 영주(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정치적 야망과 시민들의 기부금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알프스 북쪽의 고딕 양식을 가져와 교황청과는 다른 독자적인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권력자의 욕망, 그리고 대대로 그 공사에 참여하며 생계를 이어갔던 수많은 석공들의 땀. 어쩌면 이 화려함은 단순한 종교적 신심을 넘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밀라노 사람들의 자존심과 욕망이 600년간 층층이 쌓여 만들어낸 결정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 이탈리아 통일의 아버지, 비토리오 에마뉴엘 2세
광장 중앙에는 위풍당당하게 말을 타고 있는 청동 기마상이 서 있습니다. 바로 비토리오 에마뉴엘 2세(Vittorio Emanuele II)입니다. 여행 내내 이 이름을 딴 광장이나 거리를 많이 보셨을 텐데요, 그는 19세기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첫 번째 국왕이 된 인물이라 ‘이탈리아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특히 밀라노가 속한 롬바르디아 지역을 오스트리아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 영웅이기에, 밀라노의 가장 중심인 대성당 광장에 그의 동상이, 그리고 그 옆에는 그의 이름을 딴 화려한 갤러리아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겠지요. 새벽 비둘기 떼가 날아오르는 동상 앞에서 이탈리아 근대사의 무게를 잠시 느껴봅니다.
5. 소박한 겉모습 속에 숨겨진 화려함, 라 스칼라 극장
갤러리아를 통과해 나오면 라 스칼라 극장(Teatro alla Scala)을 마주하게 됩니다. “세계 3대 오페라 극장”이라는 명성에 비해 외관은 생각보다 수수하고 평범해 보였습니다. 사실 이곳은 2차 대전 때 폭격으로 파괴되었다가 재건된 아픈 역사가 있다고 합니다.
겉모습은 단조로운 신고전주의 양식이지만, 내부는 붉은 벨벳과 금빛 장식으로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다고 하니, 이 또한 ‘겉치레보다는 내실을 중시하는’ 밀라노 사람들의 기질을 닮은 건축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푸치니의 <나비부인>이나 베르디의 오페라가 초연되었던 이 역사적인 무대를 직접 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7~8월은 정규 시즌이 끝나 공연이 없기 때문이죠. 언젠가 다시 밀라노에 온다면, 그때는 꼭 턱시도를 차려입고 이곳에서 오페라의 선율에 빠져보고 싶다는 다짐을 남겨봅니다.
짧지만 강렬했던 밀라노의 새벽 산책. 화려한 쇼윈도 뒤에 숨겨진 도시의 진짜 얼굴과, 치열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활력을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밀라노에 가신다면, 꼭 알람을 맞추고 새벽 거리로 나가보시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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