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은 언제나 묘한 아쉬움과 안도감이 교차합니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2시간 남짓 밀라노의 거리를 아내와 함께 걸었습니다. 분주하게 하루를 여는 이 도시의 민낯을 눈에 담고 숙소로 돌아오니, 아들은 여느 때처럼 느즈막이 일어나 있더군요.
오늘이 주방을 쓸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 냉장고 속 식재료를 모두 털어내야 했습니다. 소박한 재고 처리였지만, 덕분에 여행 중 가장 풍성한 아침 식탁이 차려졌습니다. ‘냉장고 파먹기’는 일상에서도 흔한 일이지만, 여행지에서의 그것은 남은 여정을 위한 든든한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늘에 닿으려는 인간의 의지, 밀라노 대성당(Duomo di Milano)
오전 10시, 미리 예약해 둔 대성당으로 향했습니다. 밀라노의 심장이자 이탈리아 고딕 건축의 정점인 이곳은 마주하는 순간 압도적인 힘으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 대신 좁은 계단을 한 걸음씩 걸어 테라자(Terrazza, 지붕)로 올라갔습니다.
돌계단을 오르는 수고로움 끝에 마주한 풍경이라 그런지 더욱 값지게 느껴졌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수천 개의 조각상과 첨탑(Spire)들의 숲이었습니다.



사진 속에 담긴 첨탑들의 디테일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단단한 대리석을 마치 부드러운 촛농이나 레이스처럼 섬세하게 깎아낸 장식들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그 끝마다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굳건하게 서 있는 성인들의 조각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 Travel Insight: 600년의 고집 밀라노 대성당은 1386년 착공해 1965년이 되어서야 청동 문이 완성되었습니다. 무려 600년에 걸친 대공사였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전역이 르네상스 양식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음에도, 밀라노는 알프스 넘어 북유럽의 ‘고딕 양식’을 고집했습니다. 이는 프랑스와 독일의 건축 기술을 수용하여 밀라노가 국제적인 도시임을 과시하려 했던 비스콘티 가문의 정치적 야망이 서려 있는 결정이기도 합니다.
가까이서 본 첨탑의 장식들은 ‘완벽한 대칭 속의 끊임없는 변화’ 그 자체였습니다. 전체적인 구조는 엄격한 비례의 원칙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 안을 채우는 3,000개가 넘는 조각상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과 몸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복제가 아닌, 하나하나가 독립된 예술품으로서 존재하는 이 디테일에서 당대 장인들의 자부심과 기술력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밀라노를 내려다보는 황금 마돈나(Madonnina) 상 아래로, 과거의 유산과 현대적인 스카이라인이 공존하는 밀라노의 경제력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옥상에서 이리저리 그 숨결을 느끼다 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숲으로 들어가는 기분, 성당 내부
지붕에서 내려와 성당 내부로 들어섰습니다. 밖에서 보던 화려함과는 또 다른, 묵직한 어둠과 거대한 공간감이 우리를 덮쳤습니다.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하늘을 향해 끝없이 솟아있는 거대한 지주대(기둥)들이었습니다. 52개의 기둥은 1년 52주를 상징한다고 하는데, 그 좌우로 늘어선 모습이 마치 영화 <반지의 제왕> 속 모리아 광산이나 거대 숲을 연상케 했습니다. 사진으로 다시 보아도 기둥들이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수직선과 그 사이로 쏟아지는 빛의 대비는 인간을 한없이 작게 만드는 웅장함을 자아냅니다. 인간을 압도하는 스케일, 그것은 신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구현해 내려는 중세인들의 의도였을 것입니다.

성당의 심장부인 중앙 제단은 16세기 거장 티발디가 설계한 웅장한 신전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제단 위 높은 천장을 유심히 보면 빨간색 불빛이 반짝이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는 성 못(Holy Nail)이 보관된 곳입니다. 그 양옆으로는 이탈리아 최대 규모인 15,800개의 파이프를 가진 파이프오르간이 위용을 자랑합니다. 그 웅장한 울림이 이 석조 공간을 가득 채울 때의 전율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이탈리아의 다른 대성당들과 비교해보자면, 시에나 대성당처럼 흑백 대리석의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하지는 않았지만, 피렌체 대성당(두오모)의 수수한 내부보다는 훨씬 장엄했습니다. 화려함과 장엄함 사이, 그 절묘한 중간 지점에서 권위를 확보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쏟아지는 빛은 이 거대한 돌 숲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었습니다.

미식과 소비의 도시, 밀라노를 맛보다
관람을 마치고 성당 인근의 피자집으로 향했습니다. 관광지 한복판이라 큰 기대 없이 들어갔는데, 이번 여행에서 먹은 피자 중 단연 최고였습니다. 화덕에서 갓 구워져 나온 피자는 도우의 거뭇한 그을림조차 먹음직스러웠고, 투박하게 올려진 신선한 치즈와 토마토소스는 화려한 기교 없이도 완벽한 맛을 낼 수 있음을 증명하는 듯했습니다. 바삭하면서도 쫄깃한 도우는 밀라노가 패션뿐만 아니라 미식의 도시임도 증명하는 듯했습니다.

식사 후에는 대성당 바로 옆에 위치한 라 리나센테(La Rinascente) 백화점으로 향했습니다. 성당 바로 옆에 거대한 소비의 전당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면서도, 경제 수도 밀라노다운 배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별한 쇼핑 계획은 없었지만, 이탈리아 식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발사믹 식초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탈리아에 왔으니 와인, 치즈, 그리고 발사믹은 제대로 된 걸 경험해보자.” 시음 끝에 선택한 것은 ‘쥬세페 쥬스티(Giuseppe Giusti)’의 골드메달 제품이었습니다. 붉은 인장이 찍힌 고풍스러운 라벨과 금색 메달 장식이 돋보이는 병은 400년 역사의 자부심을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1605년부터 시작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발사믹 제조사의 제품답게, 혀끝에 감기는 진득한 풍미는 이제껏 알던 식초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단순한 조미료가 아니라 시간과 정성이 빚어낸 ‘검은 액체 보석’을 산 기분이었습니다.

트램을 타고 도시의 겉과 속을 훑다
마지막 일정으로 우리는 밀라노의 상징인 노란 트램에 몸을 실었습니다.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고, 도시를 크게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창밖 풍경은 서서히 변해갔습니다. 화려한 명품거리가 있는 중심부를 벗어나자, 관광객은 사라지고 현지인들이 살아가는 아파트 단지들이 나타났습니다. 삶의 냄새가 묻어나는 외곽의 풍경. 회색빛 건물들 사이를 지나는 클래식한 노란 트램의 색감 대비는 밀라노만의 독특한 감성을 자아냈습니다. 그곳에는 화려한 두오모와는 또 다른, 이 도시를 지탱하는 노동과 일상의 얼굴들이 있었습니다. 적당한 거리까지 갔다가 반대편 트램으로 갈아타고 돌아오는 짧은 여행이었지만, 밀라노라는 도시의 입체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여행의 마침표
오후 3시경, 아쉬움을 뒤로하고 주차장에서 차를 뺐습니다. 내일 이른 아침 출국을 위해 말펜사 공항 인근의 힐튼 호텔로 이동했습니다.
긴장이 풀려서일까요? 어제 잠을 설친 탓인지 감기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먼저 여행의 끝을 알리는 듯했습니다. 체크인 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저녁은 호텔 앞 맥도날드에서 해결했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나 똑같은 맛, 그 익숙함이 지친 몸에는 오히려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근 쇼핑몰 IPER 몬테벨로에 들러 귀국 전 마지막 쇼핑을 마쳤습니다. 매대를 가득 채운 이탈리아의 식료품들을 구경하며 여행의 마지막 장바구니를 채웠습니다. 화려한 대성당에서 시작해 거대한 현대식 쇼핑몰에서 끝난 하루. 과거의 영광과 현대의 풍요가 공존하는 밀라노에서의 마지막 날이 이렇게 저물어 갑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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