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몬테풀치아노의 유서 깊은 와이너리 ‘콘투치(Contucci)’에서 향기로운 시간을 보낸 뒤, 우리 가족은 차를 몰아 발도르차(Val d’Orcia) 평원의 보석이라 불리는 피엔차(Pienza)로 향했습니다. 이번 여정의 주인공은 단연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배경이 된 황금빛 구릉지였습니다.
1. 글래디에이터의 ‘엘리시움’을 찾아서
피엔차에 도착하자마자 우리가 향한 곳은 성벽 밖,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주인공 막시무스가 죽음 이후 가족을 만나는 ‘엘리시움(Elysium)’ 장면의 배경이 된 곳입니다.
이곳은 피엔차 성벽 남쪽 아래로 펼쳐진 산책로를 따라가야 만날 수 있습니다. 차량 진입이 엄격히 금지된 구역이라 인근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꽤 오래 걸어야 했죠. 뜨거운 이탈리아의 태양 아래 걷다 보니 “과연 끝까지 갈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막상 도착해서 마주한 풍경은 모든 피로를 잊게 했습니다.

지그재그로 늘어선 사이프러스 나무와 고풍스러운 빌라, 그리고 바람에 넘실거리는 풀밭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으로 걸어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저마다 막시무스가 된 듯 진지한 포즈로 사진을 찍는 모습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2. 르네상스의 이상향, 피엔차가 특별한 이유
다시 피엔차 성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피엔차는 역사적으로 매우 특별한 마을입니다. 본래 ‘코르시냐노(Corsignano)’라는 작은 마을이었던 이곳은 교황 비오 2세(Pius II)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 거리 곳곳이 살아있는 영화 촬영장
성벽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맞이한 건 뜻밖의 활기였습니다. 마침 마을 곳곳에서 촬영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장비를 셋팅하고 영상 촬영을 준비하고 있더라고요. 관광객 통제가 꽤나 심하게 이뤄지는 것을 보니 꽤 유명한 배우가 오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았습니다.

평소 영화 촬영에 진심인 우리 아들은 이 광경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촬영 스태프들이 카메라를 설치하고 조명을 조절하는 모습 하나하나를 신기해하며, 이리저리 주변을 돌아보며 깊은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500년 전 인본주의적 이상 도시로 설계된 이곳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 세계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최고의 무대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라웠습니다.

🏛️ 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가? 인본주의적 도시 계획의 실체
피엔차는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곳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본주의적 도시 계획’이 적용된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황 비오 2세는 즉위 전부터 저명한 인문주의 학자(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였습니다. 그가 꿈꾼 ‘이상적인 도시’는 단순히 화려한 도시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 질서를 잡은 공간’이었습니다.
- 파격적인 원근법의 광장: 마을의 중심인 ‘비오 2세 광장’은 완벽한 대칭이 아닌 사다리꼴 형태로 설계되었습니다. 이는 입구에서 보았을 때 공간이 훨씬 더 넓고 웅장해 보이는 원근법적 효과를 극대화한 것인데, 중세의 불규칙한 마을 구조를 벗어나 인간의 시각적 경험을 우선시한 혁명적인 시도였습니다.
- 신과 인간의 균형: 대성당(신), 피콜로미니 궁전(군주), 시청사(시민)가 광장을 둘러싸고 배치되어 있습니다. 신의 권위가 압도하던 중세와 달리, 인간의 권위와 시민의 공간이 신의 공간과 대등한 비중으로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한 것이죠.
- 자연을 감상하는 건축: 피콜로미니 궁전의 뒤편에는 발도르차 평원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3층 규모의 로지아(Loggia, 테라스)가 있습니다. 이는 건축물이 외부 자연을 능동적으로 감상하기 위해 설계된 인류 역사상 초기 사례 중 하나로,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나 두려움이 아닌 ‘인간의 즐거움을 위한 풍경’으로 정의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신이 아닌 인간을 먼저 생각했다”는 점이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을 텐데,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신의 질서(수학, 기하학)를 인간의 이성으로 구현하는 것이 곧 신을 찬양하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피엔차는 그 믿음이 현실로 구현된 거대한 전시장인 셈입니다.

🧀 피엔차의 명물, 페코리노 치즈(Pecorino di Pienza)
피엔차 거리를 걷다 보면 코끝을 자극하는 진한 향기가 있습니다. 바로 양젖으로 만든 페코리노 치즈입니다. 피엔차 주변의 풍부한 허브를 먹고 자란 양들의 젖으로 만들어 풍미가 남다르기로 유명하죠. 치즈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장인 정신이 느껴지는 다양한 숙성도의 치즈들이 가득했습니다. 이미 냉장고에 치즈가 넉넉해 직접 구매하진 못했지만, 그 진한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피엔차의 문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3. 늦은 점심, 토스카나의 맛
출출해진 배를 채우러 찾아간 곳은 ‘Bar Trattoria La Buca Delle Fate’. 피엔차의 좁은 골목 사이에 위치한 정겨운 식당이었습니다. 오전에 방문했던 몬테풀치아노의 와인 열기를 식혀줄 든든한 한 끼였죠.

관광지이다 보니 아주 놀라운 퀄리티는 아니었지만, 토스카나 전통 음식인 ‘파파 알 포모도로’의 투박하면서도 따뜻한 맛과 트러플 향이 가득한 파스타는 발도르차 여행의 분위기를 더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4. 풍경을 넘어선 위로, ‘비탈레타 예배당(Chapel Vitaleta)’
식사 후 우리가 향한 곳은 발도르차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포토 스팟이자, 이 땅의 수호신과 같은 존재인 비탈레타 예배당입니다.

이곳은 단순히 예쁜 사진을 찍기 위한 장소 그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16세기부터 이곳에는 ‘기적을 행하는 성모상’이 안치되어 있어, 극심한 가뭄이나 전염병이 돌 때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기도를 올리던 신성한 안식처였습니다. 광활한 들판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이 작은 예배당은 척박한 자연 속에서 인간이 신에게 기댔던 간절한 마음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구릉 위에 홀로 서 있는 작은 채플과 그 곁을 지키는 사이프러스 나무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황혼 녘에 도착하니, 붉게 물든 하늘과 부드러운 곡선의 능선이 어우러져 비현실적인 장관을 연출했습니다. 고요한 정적 속에 바람 소리만 들리는 그 순간, 500년 전 이곳에서 기도를 올리던 이들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하였습니다.


5. 사이프러스의 행렬, 포지오 코빌리(Poggio Covili)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포지오 코빌리 농가였습니다. 이곳은 입구부터 집까지 일렬로 길게 늘어선 사이프러스 나무길로 유명합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가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 영감을 준 곳 중 하나라고 하네요.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나무들의 행렬이 주는 압도적인 풍경은 카메라 셔터를 멈출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 여행을 마치며: 발도르차의 마지막 밤
숙소로 돌아오는 길, 지평선 너머로 타오르는 황홀한 노을이 우리를 배웅해 주었습니다. 발도르차에서의 마지막 밤은 역시나 두툼한 스테이크와 함께했습니다. 창밖으로 펼쳐진 어둠 속 평원의 실루엣을 바라보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피엔차의 오후를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 여행자를 위한 Tip
- 걷기 준비: 발도르차의 주요 포토 스팟(글래디에이터 배경지, 비탈레타 등)은 주차장에서 최소 15~20분 이상 걸어야 합니다. 편한 신발과 모자, 생수는 필수입니다.
- 시간대 활용: 풍경 사진이 목적이라면 해가 뜨는 이른 아침이나, 해가 지기 1~2시간 전인 ‘골든 아워’를 공략하세요. 능선의 입체감이 살아나 훨씬 멋진 사진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주차: 피엔차 성벽 내부는 거주자 우선 구역(ZTL)이므로 반드시 성벽 밖 유료 주차장을 이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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