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와의 첫 만남, 그리고 5시간의 압박
어제 난생처음 바그너의 작품을 공연장에서 만나고 왔습니다. 바로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입니다. 바그너 작품은 국내에서 실연으로 접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하는데, 운 좋게도 그 귀한 무대를 직접 볼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첫 바그너이자, 잊지 못할 강렬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사실 바그너 작품이 무대에 자주 오르지 못하는(혹은 안 오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공연 시간’이 가장 큰 장벽일 겁니다. 이번 공연도 무려 5시간이었습니다. 장장 5시간! 상상이 되시나요?
3막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막이 끝날 때마다 각각 40분, 30분의 인터미션이 주어집니다. 관객도 체력전이지만, 무대 위의 가수들과 오케스트라가 마지막까지 에너지를 쏟아내려면 이 정도 휴식은 필수겠지요. 보통의 공연이 2시간 내외인 점을 감안하면, 5시간은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도전’에 가깝습니다.
저도 이 마라톤을 완주하기 위해 비장의 무기를 준비했습니다. 바로 허리에 덧댈 작은 ‘소프트볼’입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딱딱하게 굳어가는 허리를 풀어주고, 어둠 속에서 쏟아지는 잠을 쫓아내는 데 아주 유용했으니까요. (바그너 보러 가실 분들께 강력 추천합니다.)
죽음으로 완성된 사랑? 줄거리와 솔직한 감상
오후 3시에 시작해 밤 8시가 넘어서야 끝난 이 긴 오페라의 줄거리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1막은 ‘사랑의 시작’입니다. 트리스탄은 주군(마르케 왕)을 위해 패전국의 공주 이졸데를 왕비로 모셔오는 임무를 맡습니다. 악연이 얽혀있습니다. 과거 트리스탄은 이졸데의 약혼자를 죽였으나, 부상을 입고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이졸데에게 치료를 받았던 적이 있죠. 원수를 사랑으로, 혹은 연민으로 살려낸 이졸데, 그리고 그녀를 주군의 아내로 데려가야 하는 트리스탄. 둘은 현실을 비관하며 ‘죽음의 약’을 나눠 마시려 하지만, 시녀의 바꿔치기로 ‘사랑의 묘약’을 마시게 되며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집니다.
2막은 ‘발각과 상처’입니다. 밀회를 즐기던 두 사람은 트리스탄의 친구(멜로트)의 배신으로 현장을 들키고, 트리스탄은 치명상을 입습니다. 3막은 ‘죽음과 완성’입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이졸데를 기다리던 트리스탄은 그녀가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두고, 뒤따라온 이졸데 역시 그의 시신 위에서 숨을 거두며 막을 내립니다.
작품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죽음을 통해 완성한다”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스토리 자체에 깊이 공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약혼자를 죽인 원수를 치료해 준 이졸데의 심리나, 주군을 배신하면서까지 사랑에 빠지는 트리스탄의 설정이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가슴으로 절절하게 다가오지는 않더군요. 아마도 ‘사랑의 묘약’이라는 판타지적 장치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의 사랑이 너무나 파괴적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바그너의 혁신, ‘악극’의 매력과 난해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가 음악사에서 위대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그는 기존의 ‘오페라’를 넘어 ‘악극(Musikdrama)’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오페라가 노래(아리아)와 대사(레치타티보)가 명확히 구분되어 딱딱 끊어지는 맛이 있다면, 바그너의 악극은 그 경계를 허물어버립니다. ‘무한선율’이라 불리는 끊임없이 흐르는 음악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며 다양한 감정과 주제를 전달합니다.
하지만 이 점이 관객에게는 양날의 검입니다. 기승전결의 딱 떨어지는 다이내믹함이 부족하다 보니, 자칫하면 끝없는 음악의 바다에서 길을 잃고 정신줄을 놓기 십상입니다. 저 같은 보통의 클래식 애호가들이 바그너를 어려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겠지요. 하지만 5시간 동안 그 거대한 소리의 파도에 휩쓸려 있다 보니, 묘하게 빠져드는 중독성도 느꼈습니다.
문제적 인간 바그너, 그리고 예술가의 도덕성
이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논할 때 작곡가 바그너의 사생활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술적으로는 혁명가였지만, 인간적으로는 매우 ‘문제적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을 후원해 준 친구의 아내(마틸데 베젠동크)와 불륜에 빠졌고, 극단적인 반유대주의를 주장하며 독일 민족주의를 부채질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위대한 사랑의 오페라는 그가 불륜 행각을 벌이던 당시에 작곡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부도덕한 사랑을 합리화하고,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욕망을 ‘죽음을 통한 승화’라는 미명 하에 예술로 미화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5시간의 인내를 보상받는 순간, ‘사랑의 죽음(Liebestod)’
다시 공연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앞서 스토리의 개연성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음악적으로 넘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특히 3막의 마지막, 이졸데가 숨을 거두며 부르는 아리아 ‘사랑의 죽음(Liebestod)’은 그 모든 지루함과 피로를 단번에 날려버릴 만큼 압도적인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음악적으로 이 순간이 감동적인 이유는 1막 전주곡에서부터 시작된 긴장감이 비로소 해소되기 때문입니다. 그 유명한 ‘트리스탄 코드’라 불리는 기묘한 불협화음은 극 내내 해결되지 않고 몽롱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관객의 애를 태웁니다. 그러다 장장 4~5시간의 기다림 끝에, 이 마지막 아리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음악적 해결을 이루며 폭발하듯 터져 나옵니다.
“…물결치는 토로 속에서, 울려퍼지는 소리 속에서, 세계의 숨결이 밀려오는 저 파도 속에서 빠져들고, 가라앉아 의식을 잃으니… 더없는 환희여! (höchste Lust!)”
이졸데가 죽음을 ‘더없는 환희’라고 노래하며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파도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3시간 넘게 꾹꾹 눌러왔던 에너지가 일시에 분출됩니다. 그 전율은 정말이지 중간 과정을 견뎌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감히 조언을 드리자면, 바그너의 긴 러닝타임에 지쳐 중간에 잠시 조는 것은 용서가 됩니다. 하지만, 부디 3막의 엔딩곡이 나오기 전에는 꼭 깨어나시길 바랍니다. 이 마지막 10분의 황홀경을 놓친다면, 바그너를 보지 않은 것과 다름없으니까요.

예술은 예술가와 분리되어 평가되어야만 할까?
공연장을 나서며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우리는 예술가의 도덕적 결함과 그의 작품을 분리해서 봐야 할까요?
친일 행적을 한 예술가의 작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도 맞닿아 있는 문제입니다. 그들의 죄는 마땅히 비판받고 처벌받아야 하지만, 그들이 남긴 천재적인 작품까지 부정해야 하는지, 아니면 작품은 작품 그 자체로 존중하고 즐겨야 하는지 말입니다.
바그너의 웅장한 음악 뒤에 숨겨진 그의 인간적 민낯을 보며, 5시간의 긴 여정은 저에게 음악적 감동과 더불어 풀기어려운 철학적 숙제를 남겨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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